1인칭 영화

<파수꾼> 보경(배우 정설희) 시점 

"옥상 위의 파수꾼"

「기태: 배우 이제훈, 동윤: 배우 서준영, 희준: 배우 박정민, 세정: 배우 이초희」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지나치던 환자들이 반쯤은 의아한, 반쯤은 무심한 눈으로 돌아봤다. 여긴 병원이니까 무슨 소식을 들어서 놀랐더라도 이상할 리 없다. 하지만 자살 시도를 한 친구를 보러 온 병원에서 들은 부고, 그것도 자살 소식이라니. 조금 많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데 액정에 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아 세정이가 이걸 보면 안 되는데. 급히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몇 번 씻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찼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날은 여름과 가을 사이였는데. 그 날 이후로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너에게서 들은 소식이 이런 소식일 줄은 몰랐다.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정이에게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우리는 죽음이 삶보다 덜 두려워질 정도로 엉망이 된 걸까.

 

세정이를 처음 만난 건 1학년 여름이었다. 전학 온 날부터 있는 듯 없는 듯 모를 만큼 조용했고 이름이라도 부르면 겁먹은 토끼처럼 깜짝 놀라곤 했다. 친해지기 힘들겠구나 생각했는데 짝이 되었고 심한 생리통에 종일 엎드려 있던 어느 날 따듯한 차와 초콜릿에 쪽지를 붙여서 준 것을 보고 따듯한 친구구나 생각했다. 아마 그날부터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친해졌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예전 학교생활을 물어보면 세정이는 무겁게 입을 닫았다. '있잖아 너 낙인찍힌다는 게 뭔지 알아?' '응 알아.' 어떻게 알아?' '그냥....알아' 세정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내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도 한 계절이 더 지난 이후였다. 

 

그래도 세정이는 그 이후로 놀랄 만큼 밝아졌다. 곧잘 눈물을 글썽였지만 그만큼 자주 웃었다. 동윤이를 좋아하게 됐다고,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수 잇을 줄 몰랐다고 고백하는 네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또 상대가 동윤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마냥 행복해보이는 모습이 부러울 만큼 예뻤는데.. 세정이는 다시 자살 시도를 했고 이렇게 병원에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너에게. 아무리 들어보려 해도 의식을 찾은 세정이는 굳게 다문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세정이를 만났을 때, 세정이는 기태 주변에서 옛 학교의 무리를 봤다며 불안해했었다. 기태야, 세정이가 이렇게 된 게 너랑 나랑 관련이 있는 거니.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너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됐구나.

 

바람을 더 쐬다가 병실 문을 열었다. 세정이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애써 밝게 말을 걸었다. 세정이는 아직 이걸 들으면 안 돼.

 

"일어났어? 몸은 좀 괜찮아?"

"들었어?"

"뭘?"

"기태.. 자살했다며."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안걸까. 아니 모르기도 힘든 일이지. 하지만..

 

"다녀와야지. 장례식장"

"응?"

"다녀와.. 나는 아직.. 못 갈 것 같아."

 

세정이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조금 이불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곧이어 다시 미동이 없어졌다. 조용히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들었다. '대신 인사 전해줘' 소곤대듯이 말하는 세정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병원을 나섰다. 기태의 장례식장이 있는 병원은 공교롭게도 세정이의 병원 바로 옆, 병원이었다. 가는 길에는 비가 많이 왔다. 비가 와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내가 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나는 그저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왔을 뿐이야.

 

기태야 그거 알아? 내가 너 많이 좋아했던 거. 우리 다 같이 월미도 가자고 말하기 훨씬 전부터. 네가 자꾸 희준이랑 엮으려고 할 때마다 괜히 너무 서운했었는데 그래도 네가 자꾸 보고 싶어서 부를 때마다 안 갈 수가 없었어.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용기내서 고백했을 때 넌 아주 당황했잖아.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말했지. 나는 말했는데 너는 못들은 고백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래서 그 이후로 연락을 할 수 없었어. 연락은 하지 않아도 간간히 이야기 들으면서 나중에 꼭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보러가는 길이 이런 길일 줄은 정말 몰랐어.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낯익은 얼굴은 희준이 밖에 없었다. 눈이 붉었다. 희준이가 눈인사를 하고, 희준이의 눈을 따라 기태의 사진을 봤다. 오랜만이야 기태야. 여전히 잘생겼네. 비구름을 건물 안까지 갖고 들어온 모양이다. 자꾸 뺨에 비가 내렸다. 

 

기태야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함께였던 시간은 행복하기만 했는데 왜 돌아서면 이렇게 불안해지고 외로워지는 걸까. 나는 네가 왜 투신했는지 몰라. 세정이가 왜 손목을 그었는지 몰라. 도무지 모르겠어. 그런데 알 것도 같아.

카나리아 알지. 카나리아는 공기에 가장 예민한 새여서 동굴로 들어가는 광부들이 혹시 유독 가스가 새는지 알기 위해 카나리아를 들고 들어갔대. 새가 이상하거나 죽으면 그건 공기가 독한 가스로 가득 찼다는 뜻이라고. 세정이는 카나리아, 너는 파수꾼이었을지도 몰라. 여리고 예민해서 공기가 탁해지면 숨이 멈추는 카나리아. 저기 위에서 성 안의 사람들을 위해 밖을 지켜보다가 위험을 제일 먼저 발견하는 파수꾼. 그래서 늘 쓸쓸하고 조금의 불안이라도 보이면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파수꾼 있잖아. 카나리아보다 강하고 상처 같은 것 받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만큼 여리고 고독한. 하지만 나는 네 손을 잡아줄 수 있었는데.

 

기태야 그거 알아? 너한테 한 고백 있지. 그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먼저 한 고백이었어. 그러니까 너를 잊어버리지는 못할 거야. 내가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이니까. 나도, 희준이도, 동윤이도, 누구도 너를 잊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지켜봐줘. 빈 교실에서, 옥상 위에서. 혼자 있는 밤에. 세상이 죽음보다 무서워지는 시간에. 우리 곁에 있어줘. 너를 생각하면 우리가 혼자이지 않을 수 있게.

 

나는 이제 세정이에게, 삶으로, 일상으로 돌아 가볼게. 네가 자주 생각나겠지만 그럴 수 있을 거야. 언젠가 또 보게 될 날까지 안녕. 안녕, 파수꾼.

 

윤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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