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정지우 ​<4등>

천혜윤
“바다의 꿈을 꾸는 스위머, 스위머의 꿈을 꾸는 병든 어른들”

 푸른 물빛, 여덟 개 길을 터는 노란 레인, 그 사이로 인어처럼 유영하는 소년들. 로우 앵글로 담은 소년들의 발버둥이 너무 아름다워 섬뜩해진다. 수영은 본래 아름다움을 위한 종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올림픽 기간 화면이 늘어지도록 반복해 볼 수 있었던, 물길을 헤치는 선수들의 몸짓은 오로지 그것이 끝나는 순간의 기록을 위해서만 유효하다는 사실도.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한계의 순간들과 마주하고 거스르기를 반복하는 선수들에 과정의 즐거움을 묻는 일은 가혹하다.

 

 그러므로 유리창 밖으로 들어오는, ‘우주에서 오는 것 같은’ 햇살을 사랑하는 이 소년이 햇빛처럼 반짝이는 물길 속에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은 어쩐지 스포츠에 대한 배반처럼 느껴진다. 소년은 서둘러 가고 싶은 게 아니라 깊이 유영하고 싶다. 부글대는 물방울이 얼마나 오랫동안 손 안에 남을 지 쥐어보고 싶다. 그는 수영의 속성인 ‘속도’를 무시하고 얼마 깊지도 않은 수영장의 밑바닥으로 침잠한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도’ 붉어진 얼굴로 매질 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코치. 스위머(swimmer)로서의 소년의 장래를 염려하는 관객이라면, 누가 그런 코치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런데 <4등>은 스포츠 영화이면서 그 ‘당연함’ 이 정말로 당연한 것이었는지를 꿋꿋이 캐묻는다. 우리 모두가 외면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던 순간들을 위해, 헤엄치는 스위머의 두 발을 붙든다.

 

 중학생 여자 농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아이들, 연습 때마다 줄을 서서 코치에게 뺨을 맞더라는, ‘중학생?’ 하고 되물었다가 이내 ‘농구단이니까’ 라고 수긍해버렸던 괴담 같은 이야기. 굳이 폭력의 문제를 논하지 않더라도, ‘멘토’의 환상이 지난 시간 우리를 사로잡아왔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 <굿 윌 헌팅(1997)>같은 작품들의 범람과, 질세라 등장한 <완득이(2011)>, <파파로티(2012)> 같은 영화들에서 대중의 멘토에 대한 갈망을 엿볼 수 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신화라지만, <위플래시(2014)>같은 작품이 환영을 걷어내면서 멘토 서사는 주춤거린다. 헌데 <4등>은 그 연장선상에 서서 반(反) 멘토를 넘어 멘토가 없음으로서 완전해질 수 있는 ‘나’ 라는 역설을 안고 달려간다.

 

 우리는 여기서 영화 전반부의 절반이 수영 코치 광수의 사연에 소진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름판과 소주, 광수가 어울리는 남자들의 주름은 흑백의 핸드헬드 안에서 불안하게 요동친다. 그의 불성실함이 카메라 안에서 얼마나 집요할 만큼 길고 자세하게 묘사되던지, 다시 태릉선수촌에 도착한 광수에게 ‘100대 맞자’는 코치의 불호령은 애달프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광수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겪은 폭력을 고발한다. 영화는 기자의 대답을 직접 들려주지 않지만, 굳이 광수의 입으로 재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강 그가 들었을 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럴 만 했다’는 것. 그렇게 폭력의 불가해함이 불가피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광수는 괴물이 되었다.

 

 폭력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개인이, 기억 속의 사건을 재연해 자신의 위치를 가해자로 바꿈으로서 그의 악몽을 제3의 상대에게 전염시키는 일은 이제 흔한 비극이 되었다. 주인공 준호가 자신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를 동생에게 돌려주어 매질하는 장면에선 어린이 주연의 영화에선 찾기 어려운 섬뜩함이 밀려온다.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이 서늘함은,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빠르게 발버둥치는 ‘스위머(swimmer)’의 삶을 동경하는 병든 어른들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4등>은 보여준다. 노력이나 절박함, 간절함 같은 단어들로 대체되는 폭력의 레인을 벗어나 유영하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선수들보다 더 아래, 더 깊이 잠수해 햇살 같은 물빛과 헤엄치는 준호의 수영에 주어지는 ‘1등’의 타이틀은 이미 숫자와는 무관한 찬사라는 것을.

 

 영화는 종종 의도적으로 수영장 물 안을 마치 심해의 바다처럼 묘사한다. 어른들에겐 수영장이었을 삶이 준호에게 이르러 바다가 되는 순간은 잊을 수 없다. 수영, 아름다운 종목으로 불러도 괜찮을까. 우리의 삶, 바다 속을 헤엄하는 스위머가 되어도,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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