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네마

임태규 ​<폭력의 씨앗>

이문재 ​'오래된 기도'

김민범
"구원 없는 기도"

망가진 하루는 고칠 수 없다. 어제는 죽을 날이었는데, 게걸스럽게 잠들어 버렸다. 혼자 되기 위해서는 밤이 필요하다. 하루를 다시 살아보기로 한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모든 감각을 상대에게 맞춰도 미끄러지고 만다. 익숙해지는 폭력 앞에서 능숙해지는 건 상대의 비위를 들러 맞추는 일이 아닌 어금니를 꽉 깨무는 일이다.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리지만, 고요를 견딜 체력이 없다. 또 아침이다.

 

일병 주용은 매일이 버겁다. 이제 갓 일병이다. 1년 6개월의 군 생활이 남아있다. 새로 들어온 후임, 이병 필립은 미국에서 와 한국 사회가 낯설다. 위로는 선임들이 득실댄다. 각자도생에 바쁘다. 최악은 말년병장이 전역하지 않고, 간부교육을 받고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들과 분대 외박을 나간다. 숨을 곳이 없다. 누군가 견딜 수 없어 보고한 폭행은 조치가 아닌 색출 해내야 하는 일이 된다. 주용 혹은 필립이 보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덮친 격으로 필립의 앞니가 부러진다. 주용과 필립은 주용의 매형에게 이를 고치기 위해 인천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주용이 마주하는 건 누나를 잠식해가는 또 다른 폭력이다. 도저히 소생 불가능한 하루다.

 

영화는 인물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폭력에 절여져 있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긴장이 곧추서있는 주용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타지도 않을 쓰레기 말년병장의 이등병 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선임들은 관습적으로 폭력을 하달하고, 후임들에게 전수한다. 폭력을 당하거나 직접 행해야 하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주어진다. 어설픈 결단은 발길질로 돌아온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착취되어야 한다. 국가는 군인을, 간부는 병사를, 선임은 후임을 차곡차곡 채굴해서 체제를 유지한다. 책임과 억울함을 위가 아닌 아래서 찾도록 자근자근 밟는다. 폭력에 감염된 이들은 좀비처럼 이곳에서의 삶을 연장하고, 물어뜯을 다음 희생자를 기다린다. 누가 보고 했는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 책임질 사람만이 필요하다. 제물은 가능한 신선한 육체와 정신을 지녀야 한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이문재, <오래된 기도> 中

주용과 필립은 돌아가야 할 버스 터미널 화장실에서 나뒹군다. 서로에게 주먹을 겨누고, 소원 수리에 대한 책임을 넘긴다. 어쩌면 주용의 모든 몸짓은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필립에게 사제 군번줄을 해준 일도, 친누나를 만나기 위해 선임을 간곡히 설득하던 일도, 이 모든 폭력에서 구원될 수 있도록 간부에게 쪽지를 적는 일까지 모두 주용에게는 기도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든 폭력이 끝나있기를 바라며 매일 밤 눈을 감았을 것이다. 필립을 향한 주먹질은 기도를 무용하게 만든다. 주용은 이제 씨앗을 심었다. 회개해서 주먹보다 기도를 믿는 신도가 되거나 설득보다는 윽박을 택하는 비틀어진 계시를 받을 수도 있다. 무엇으로 피어날지는 시간만이 알고 있다.

 

아침은 밤이 되고, 밤은 아침이 된다. 이병은 일병이 되고, 일병도 결국 병장이 되어 군대를 떠난다. 야간 근무에서 수백의 새벽달을 바라보고, 수십 번 모포와 포단을 털어 햇볕에 말리고, 크고 작은 훈련에서 식은 밥을 먹고 나서야 구렁텅이에서 벗어난다. 기도는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을 받는다. 누군가는 술자리 안줏거리를 한 뭉텅이 챙겨 나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쪽 구석이 짧아진 절름발이가 되어 나온다. 전투화 뒤축에 붙은 폭력의 감각은 사회에서도 자주 들러붙는다. 전역이라는 느낌은 오래도록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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