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or 人

박영주 <선희와 슬기>

미래

들어가며.

‘이름 없는 것들을 호명할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을 꿈꿉니다’라는 소개를 필두로 기획안을 작성하고 지면을 할애 받았다. 그리고는 이름에 대한 영화를 첫 소재로 비장하게 골랐다. 슬기에게서 발견한 ‘보통’의 삶을 나누고 싶었다. 독립영화에는 사회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어 마음 쓰이는 인물이 유독 많다. 리뷰를 매개로 영화 속 누군가의 삶을 관찰하는 걸 넘어 우리들 사는 얘기를 펼쳐낼 수 있기를 바란다. 처음이니 내 소개를 해야 하려나.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다가 영화까지 좋아져 버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균열을 내고 싶은 사람.

이름값

 자기소개를 할 때 언제부터인가 성을 떼어냈다. 내 마음에 드는 구석만 알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빠와 공유하는 성씨에는 그와의 달갑지 않은 기억들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다. 날 때 주어진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직접 선택하는 건 옛 이름으로 살아가던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내게 ‘성미래’와 ‘미래’의 시간은 전혀 다르게 구성된다.

 ‘선희’이자 ‘슬기’(여기서는 잠시나마 행복했던 ‘슬기’로 부르자)인 영화의 주인공 또한 그러하다. 죽을 용기가 부족해 살게 된 슬기는 자살시도를 기점으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다시 말해 실패와 거절로 점철된 생을 살던 최선희는 죽기에 성공했다. 물에서 다시 나온 건 최선희가 아닌 김슬기이다. 슬기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보육시설에서 살고 있고 슬기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과거와의 완벽한 분리다.

 왜 하필 슬기였을까. 슬기는 선희가 죽으러 가려고 탔던 버스에 동승했던 아이의 이름이다. 사랑받는 아이가 가진 이름을 차용한 것은 자신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겠다는 슬기의 다짐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외톨이었던 최선희는 김슬기가 되어 안정적인 친구 관계와 원장선생님의 믿음, 모범상까지 모두 뜻한 대로 쟁취한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종다양해서 그 중 무엇을 보이는지에 따라 그 이름엔 다양한 값이 매겨진다. 슬기는 층장이라는 역할을 선점한 채로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물적 자원을 이용한 서툰 인정투쟁은 그만두었다. 그건 값어치 낮던 선희가 구사하던 실패한 방식이다. 혼자 급식을 먹던 슬기에게 ‘안녕, 층장’이라는 인사를 건네며 옆자리에 앉는 친구들을 보면 새 전략은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모범생 슬기는 실종 청소년 전단의 등장에 발목 잡힌다. 원장선생님께서 실망하실 게 분명하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안정적 지지집단을 경험해보지 못한 슬기는 애정을 철회당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심지어 ‘슬기 넌 좋은 애’라는 원장선생님의 말씀은 슬기가 좋은 애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기에 전단을 붙들고 ‘한 번만 모른 척 해 달라’는 건 살려달라는 외침과 다르지 않다. 이마저 거절당했을 때 슬기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다. 이제 김슬기라는 이름에는 모범생이 아닌 거짓말쟁이에 방점이 찍힐 판국이니 도망쳐야 할 때다.

 이 쯤 되어 친구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번듯한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된 나의 소중한 친구. 그녀는 낮에는 선생님으로 밤에는 노래방 도우미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한다. 선생님과 아가씨의 간극은 아주 넓어서 대우의 차이를 듣고 있자면 구역질이 난다. 성산업 종사자들은 실장이나 손님에게 절대 본명을 말하지 않는다. 그 때가 아영이로 일할 때였나. 일하던 도중에 맞은편에 앉은 손님이 혹시 자기 모르냐고 물어보더란다. 학교 후배였다.

 사회적 약자는 눈치가 빠르지 않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후배보다 먼저 얼굴을 알아채고 자리를 피했어야 했다. 첫 번째 눈치싸움에는 실패했다. 두 번째 눈치싸움은 ‘그 불편한 자리에서 누가 나갈 것인가’였다. 친구는 기민하게 상황을 읽어 내렸고,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다. 자기를 모르냐는 당당한 질문에 ‘너는 왜 여기 있느냐’며 역으로 물을 수 없던 건 그녀가 그 자리에서 선생님도, 선배도 아닌 아영이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아영의 이름에는 질문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후배는 도우미들을 세워두고 외관을 비교해 누구를 파트너로 앉힐 것인지 골랐고, 선택받은 아영이가 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양 떠는 것이 전부다.

 방울이가 되어 또 다시 어디론가 도망치는 슬기에게 친구가 겹쳐 보였다. 눈치를 보다 사라지는 건 언제나 힘없는 자의 몫이다. 무엇이 그들의 이름을 빼앗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영화 속 정미의 표현을 빌어보자면 ‘불쌍’한 사람들만이 이름을 박탈당한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빵’과 ‘장미’가 모두 필요하다고 했던가. 각자 빵과 장미가 없었던 내 친구와 슬기는 나란히 이름을 빼앗겼다. 가명을 모조리 버리고 제 이름으로 살려면 사회가 그들에게 그럴 권리를 허락해 주어야 한다. 친구는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그 때 이후 한참을 출근하지 않더니 결국 다른 사무실을 찾아 유진이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존할 수 없었다. 갈 곳 잃은 슬기가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다가 섬뜩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발붙일 곳도, 이렇다 할 노동 경력도, 이름도 없는 소녀가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이 나라에 얼마나 있던가. 반면에 가명을 쓰는 여성들의 세계는 도처에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는 순간 아찔하다.

 그래서 더욱 온 마음 다해 슬기를 응원하고 싶다. 슬기가 이름을 되찾기는 요원해 보이지만 이를 리셋증후군이나 리플리증후군 따위로 명명하는 건 모진 일이다. 슬기가 자신의 빵과 장미를 찾아 떠났다고 하면 어떨까. 슬기의 표류는 위태롭지만 새 이름은 계속해서 그마다의 기회를 만들어낸다. 정말로 이름마다 값이 있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이름과 그렇지 못한 이름이 따로 있다면, 이 영화는 끝끝내 도망치는 처연한 소녀가 아닌 끊임없이 또 다른 삶에 도전하는 주체의 이야기다. 슬기는 도망친 게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게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니까.

© 2023 by Andy Deck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