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 
불이 켜진 후 하고 싶었던 말들

정지우​ <4등>

김팝콘
2019. 04. 21

Prologue

커가면서 미워하게 된 말이 있다. ‘열심히 하는 건 아무나 해, 잘 해야지.’ 나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왜? 라는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좋아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왜 나의 노력은 가치의 기준이 되지 못할까? 왜 남들과 비교를 해야만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도 나는 이 말을 미워하진 않았는데. 결정적으로 이 말을 미워하게 된 계기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에게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잘해야만 해.’ 라고 읊조리는 것을 깨닫고 나서였다. 내가 결코 옳다고 믿지 않았던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있을 때, 나는 이 말을 완전히 경멸하게 되었다. 애초에 좋아서 시작했다. 좋다는 게 전부였다. 좋아서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열심히 하는 과정마저도 즐길 수 있었다. 남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어겨지는 순간, 나는 내가 좋아했던 영화를 더 이상 즐기고 싶지 않았다. 다시 영화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던 순간이었다. 새벽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데, 그냥 눈물이 났다. 슬퍼서도 아니고 화나서도 아니었다. 그냥 영화를 본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지워버리고, 영화를 오롯이 혼자 대면한 순간, 나는 내가 영화에 완전히 코가 꿰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영화를 좋아하고 싶다고, 그래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지금의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4등>을 채우고 있는 것

간단한 소개와 함께 영화의 미덕을 먼저 말하고 싶다. <4등>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영화가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 논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수없이 재단 지어지는 사회 안에서 무시받기 쉬운 단순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감정인지, 소중한 감정인지 이야기하고자했던 의도와 노력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특히 영화에서 준호가 홀로 밤의 수영장을 찾아 수영하는 장면은 (감독의 장기인 섬세한 연출력과 더불어) 오롯이 수영, 물, 그리고 그 안의 준호만으로 벅찬 사랑의 감정을 전달한다. 준호만이 가치를 아는 빛의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어디에나 있지만 그 누구도 가치를 논하려 하지 않는 빛의 의미를 말하는 이는 오직 준호뿐이다. 수영을 사랑하는 준호의 마음이 수영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에 녹아있는 빛의 이미지로 확장될 때, 영화는 ‘수영’이라는 하나의 분야만이 아니라 삶의 전반으로 확장되어 사랑의 가치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는 제 주제에 가닿지 못한다. 아마 감독조차도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긍정하고 있거나, 믿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렇기에 영화 안에서의 폭력은 제대로 마무리 지어지지 않고, 영화 속의 그 누구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따위의 가치를 논하지 못한다.

 

영화를 가볍게 복기해보자. 오프닝 시퀀스. 김강수의 선수시절이다. 그는 연습시간을 어기고 도박을 한다. 그래놓고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처럼 당당하다. 연습을 빼먹은 것도 도박을 한 것도 큰 잘못이다. 화가 난 코치가 자신을 때리자 맞기 싫다며 수영을 관둔다. 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때릴 수가 있냐며 기사를 써달라고 말한다. 끝까지, 자기는 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16년 후의 김강수의 모습. 여전하다. 여전하다 못해 더 나빠졌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기만하며 폭력을 이어오고 있다. 강수는 영화 내내 가슴팍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오는데, 과연 이 김강수라는 인물이 한국 스포츠계 코치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강수는 ‘반성’이 필요한 인물이다. 성공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일종의 강압과 폭력이라는 방식으로 준호에게 반영했다면, 그가 왜 욕망에 달하지 못했는지 깨닫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강수는 자신이 망한 이유가 폭력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강수가 새로이 고민하게 될, ‘자신이 어떤 태도로 수영을 대했는지’와 ‘좋은 교육자’의 일면을 관객들에게 함께 전달해야했다. 그것이 폭력을 대하는 태도-폭력을 가하는 사람의 성장과 폭력을 당한 사람의 성장-이며, 영화가 담고자 했던 주제가 훨씬 빛을 발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강수의 성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반성하지도 망하지도 않았다. 과연 이 영화에서 그가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 강수의 전사로 채워진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의문은 준호의 엄마에 의해 더 가중되었다.

준호의 엄마는 자신의 안녕 따위는 빌지도 않고 준호와 기호 그리고 그의 남편의 안녕만을 빈다. 영화 안에서의 그녀는 ‘준호 엄마’외에 인생이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왜 준호의 수영에 집착하는지 영화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더 적확하게 말하면, 영화가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수영장에서 강수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를 때 강수는 자신의 폭력에 대해 스스로 합리화했다. 영화는 그것을 도왔다. 그러나 차 안에서 준호에게 소리를 지르는 준호의 엄마에게 영화는 합리화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히스테릭하게까지 보이는 그녀의 태도가 어떤 결핍과 욕망에서 나오는 것인지 관객들은 끝까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영화 안의 폭력을 뒤집어쓰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왜 그녀의 삶에는 아들들 외에 다른 목표를 세울 수 없게 되었는지, 왜 다른 엄마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준호의 성적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관객들은 끝내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그저 집착적인 엄마라는 이미지뿐으로, 영화 안에서 자취를 감춘다. 만일 이것이 엄마들의 현실을 담고자 한 것이라면 이 또한 문제다. 영화 안의 한 캐릭터로서의 주체는 그 주체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주체성을 잃은 캐릭터는 더 이상 캐릭터가 아닌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 안에서의 ‘준호 엄마’는, ‘그녀’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폭력을 뒤집어 쓸 ‘준호 엄마’라는 도구로써 필요했다는 말이 되고 만다. 과연, 그녀가 도구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준호 엄마에 대한 감독의 무관심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남은 건 이야기의 중심인 준호다. 필연적으로 성장을 해야만 했을 준호. 준호의 성장이 오로지 그의 성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독도 알고 관객도 알고 준호도 알았을 것이다. 그가 성장해야했던 지점은 자신이 수영을 대하는 마음을 알고 무엇이 중요했던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주변에 치여 어느새 목표가 되어버린 ‘1등’을 잊고, 자신이 수영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성적을 위한 것이라는 변명은 변명도 되지 못할 나부랭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방점에 있는 것이 바로 수영을 그만둔다는 사건인데, 오히려 영화 안에서는 이 사건에서 발을 헛디딘다. 바로 준호가 동생 기호에게 자신이 당했던 폭력을 그대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부분이다. 폭력이 답습된다는 것, 합리화된 폭력은 정당하다고 세뇌 당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거북함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사용된 장면이라면 정리가 되었어야한다. 준호가 잘못을 깨달아야하는 순간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돌연 강수를 찾아간다. 기호에게 가해진 폭력은 마무리되지 않는다. 좀처럼 영화 안에서의 폭력은 매듭지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준호는 1등을 해버린다. 준호가 1등을 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준호가 수영을 한다는 것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컷을 잘게 끊고, 슬로우 모션 효과를 통해 ‘수영’을 한다는 사실보다 ‘경기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급급하다. 영화 내내 대조되었던 ‘불이 꺼진 수영장 속 준호의 가득 찬 행복감’ 대신, ‘불이 켜진 수영장의 다급함과 위태로움’을 그대로 가져간다. 1등을 해낸 준호는 물안경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벅찬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멋지다고 생각한 형이 들린다던 음악도, 도둑수영 장면에서 준호가 듣던 나직하고 편안한 물소리도 듣지 못한 채, 경기는 끝이 나버린다. 과연 어떤 오롯한 자신의 세계도 구축하지 못한 준호의 1등을 진정한 성장과 성공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지 의문을 거둘 수 없다.

 

강수의 코치가 강수에게, 강수가 준호에게, 준호가 기호에게. 답습되어 내려오는 폭력은 노골적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정작 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했지만,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저 프레임 속에 박제된 폭력이야말로 폭력의 전시가 아닌지, 과연 이 영화가 폭력의 답습과 고통에 대해 말하겠다고 나설 자격이 있는지, <4등>을 채우고 있는 것이 진정 행복과 성장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본 글이 과연 진정한 성공의 모습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 2023 by Andy Deck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