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 
불이 켜진 후 하고 싶었던 말들

최시형​ <영시>

김팝콘
우리의 아름다웠던 순간의 이름들

지난 겨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한 오렌지필름 기획전으로 <영시>를 보았다. 한창 입시 중이었지만 학원을 관둔 이후로는 줄곧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전전했었다.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영화관과 카페, 그리고 거창한 이유가 없이 그저 ‘좋은’ 것을 찾아 헤맸다. 철없이 명분 없이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었던 3개월이었다.

<영시>는 그날 최시형감독에게 들었던 말대로 ‘하지 말라는 것은 죄다 한’ 영화였다. 180도와 30도는 우습게 넘고 수평은 되도록 지키지 않는다. 컷은 신명나게 뛰고 노이즈는 잔뜩 껴서 심지어는 화면에 보이는 것이 없는 장면들도 있었다. 지켜야한다고 말하는 규칙 따위는 지킬 생각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영화는, 맨 몸으로 걷고 달리고 움직이며 활기를 갖는다.

<영시>에 대해 쓰고 싶다, 하며 다시 영화를 보았을 때 생각이 난 것은 박상영 작가의 단편소설 [재희]였다. 많은 평론가들의 말마따나 ‘객관적인 자기 판단 능력’을 가진 작가는 소설 안에서 한 시절의 끝을, 그리고 그 시절의 아름다움에 대해 회고한다. 끝이 다가왔음에 낙담하거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하지 않고, 오롯이 추억한다. 방점은, 추억한다는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영시> 속 권철과 상수, [재희] 속 영은 시절이 끝이 났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는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는 문이 닫혀버린 시절에 그들이 취하는 태도는 추억과 아로새김의 태도이다.
<영시> 속 권철과 상수의 방은 사진과 시들이 잔뜩 붙여져 있다. 그들이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새겨왔던 순간과 감정의 이미지들은 ‘시를 쓰기’와 ‘사진을 찍기’라는 행위를 통해 언제든 돌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영화는 이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며 권철과 상수 그리고 유진이 함께한 짧은 여름을 추억으로 만들고자 한다. 영화의 중간중간, 주체가 누구인지 모를 홈비디오와 같은 화면이 나타난다. 당장 권철과 상수, 유진 옆의 누군가가 캠코더로 그들을 촬영하고 있는 것처럼, 철없고, 아무런 사유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았던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재희] 속 영 또한 그들이 사진을 찍고 시를 쓰는 것처럼 재희에 대한 소설을 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재희에 대해 회상하며 재희와 함께 했던 시간을 쓴다. 상수는 권철과 유진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그들이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순간을 만들어가는 이, 감정을 함께 나누는 이가 누구인지 되뇌이고 또 되뇌인다. 영은, 재희라는 이름을 쓰고 또 쓰며, 그와 함께한 시절을 추억한다. 영에게 한 시절은, 시절에 대한 추억은 ‘재희’라는 제목을 갖게 된다.

소리 없이 왔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상수의 시 속의 인물들처럼, 영화 속의 사람들도 대뜸 찾아왔다가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 재희와 영도, 계획 없이 우리가 되었지만 어느 새 우리가 아니게 된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고 땅땅, 못이 박힌 시절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이 순간을 사랑했다고 말하며 마음속에서 문을 닫아 주는 것이다.

권철은 엄마의 유골을 계곡에 뿌린다. 유진은 립스틱으로 인사를 남겼다. 상수와 상수의 연인은 함께 사진을 찍고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는 함께 갔던 바다에 찾아가 다시 권철과 이야기를 나누며 놀기도 한다. 재희의 결혼식 날 영은 울었고 그런 영 대신 재희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인사를 건네며, 한 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의식을 치러준다.

<영시>를 보던 무렵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끝이 나지 않기를 바랐던 나의 철없고 순수했던 사랑은 서서히 끝이 나고 있었고, [재희]를 읽을 때 혼란스럽고 벅찼던 여름은 어느덧 저물어 찬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충분히 열심히 사랑했기에, <영시>와 [재희]의 여름은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 동안 지나쳐온 수많은 순간들과 앞으로 닥쳐올 무수히 많은 순간들 모두, 어떤 이름으로, 열심히 사랑하게 되기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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