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공모전 [Re-wind}

김대환, <초행>

글 : 김지현

어른 되기에 대한 단상

 

소년은 청년이 된다. 청년은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된다. 이제 막 청년의 범주에 들어선 내가, 앞날을 생각하며 가장 두려웠던 것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어떤 일을 하고 싶니’ 따위의 질문들에 여전히 ‘모르겠는데요.’ 같은 회피형 대답만 던지면서, 굳이 무엇이 되어야 하나, 따위의 의문만 갖은 채로, 그저 ‘어른’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의 자리를 텅 비워둔 채로 남겨두었었다.

 

아마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가슴이 갑갑하다 못해서 울렁이던 마음은 이런 공백 때문이었을 거다. 영화 속의 지영과 수현이 어른들의 일면을 보면서, 제가 되어야할 무엇인가가 뭔지 모르겠어서, 체념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거다. 나의 공백, 그리고 그들의 공백.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어떤 일을 하고 싶니. 기어코 닿아야하는 공백을 남긴 채로, 지영과 수현은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과 어른이 되어가는 이들을 본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지영과 수현을 본다. <초행>은 수많은 질문과, 질문들에 답을 내기 위해 행해지는 본다는 의식 아래서 시작되었다.

 

지영과 수현은 7년 된 오래된 연인이며, 동거하는 사이다. 어쩌면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사이이다. 그들은 서로의 가족을 만난다. 서로의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진 관계.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구세대, 가족의 관계 속에서 청년들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과연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지영이 가지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와 수현이 가지고 있는 대학원 진학 등의 문제들에서, 둘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결혼과 아이의 문제, 궁극적으로는 지영과 수현의 가족들로 보이는 구세대와 현세대의 갈등,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이 권력 간의 갈등으로 보이는 시대의 갈등이 되기까지. 지영과 수현은 천천히, 나지막하게, 조곤조곤 그들의 길을 걸어 나간다. 영화 또한 동일하게 큰 연출적인 기교 없이, 나직하게 그들의 발걸음을 좇는다.

 

지영은 사회적인 성공 절차를 거부한다. 그녀가 거부하는 대상은 그녀의 가정 속의, 엄마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지영은 자신의 결혼과 출산, 머리와 옷 따위의 외관까지 잔소리하고, 끝없이 이사를 하며 좋은 동네, 좋은 집, 집값 따위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엄마가 영 마뜩잖다.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에 발맞춰 살아온 그녀의 엄마 또한 비정규직에, 임신 여부도 알 수 없고, 오래된 연인과 동거를 하면서 결혼 생각은 없다는 그녀의 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영은 엄마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자신과 자신이 선택한 것들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고, 그녀의 엄마는 지영에게서 등 돌린 채 자신이 걸어온 사회의 궤도로 언제 돌아올 예정이냐며 다그친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도, 울음을 내보이지도 못하는 관계는 결국 지영이 자신의 선택 하나 들어가지 않은 집을 도망치듯 나오며 얼버무려진다.

수현은 권위적 사회구조를 거부한다. 그의 아버지, 말하자면 ‘김첨지적 아버지상’인 그는 수현의 어머니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욕을 퍼붓고,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의 아들이 몇 살인지도 모를 정도로 가정에 소홀하다. 수현은 그의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고향인 삼척을 ‘무서운 동네’, ‘무서운 이야기’ 따위로 지영에게 전한다. 아버지가 사는 곳을 둘러보지만 다 돌아갔다는 알람이 울리는 빨래에는 손도 대지 않고, 식사 자리에서는 아버지가 보이지도 않는 곳에 앉는다. 자신이 엄마처럼 될까 봐 엄마가 되기 무섭다고 말하던 지영에게 ‘알면 싸우면 되는 거지.’라고 말하던 것처럼, 그는 자기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본다. 어머니에게 욕을 하며 화를 내던 아버지를 보고 나왔을 때, 자신을 따라 나와 돌아가자고 설득하던 지영에게 화를 내고는 돌아와 사과하던 모습. 그는 자기 아버지를 봄으로써 그의 아버지를 거부한다. 제대로 된 대화 한 마디조차 나눌 수 없는 관계는 그저 ‘나쁜 예’의 거울인 채, 그렇게 영화 안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가정 속에서, 자신이 거부하고자 하는 어른의 단면을 보지만, 서로의 가족에게서 자신이 닮고자 하는 어른의 단면을 발견한다. 수현은 지영의 아버지에게서, 지영은 수현의 어머니에게서, 각자의 가정 속에서 상징적으로 지워버린 아버지, 어머니라는 위치를, 어른의 모습을 대체한다. 함께 불안한 그네에 앉아서 자신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도움을 구하던 지영의 아버지처럼, 작은 마루에 마주 보고 앉아 자신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오징어 다리를 뜯어주고는 많이 생각해보고 결혼을 결정하라던 수현의 어머니처럼,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앞날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고 조언하기도 하는 어른에게 맘을 놓는다. 그들은 서로를 선택해, 함께 길을 걸어 나가기에 비워진 어른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찾고 수용한다.

 

지영과 수현은 나란히 눕고, 나란히 차에 탄다. GPS가 망가진 수현의 핸드폰 대신 지영의 핸드폰으로 길을 찾고, 우는 지영을 수현이 달래고, 화난 수현을 지영이 설득하고, 그로 인해 함께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앞날에 대해 고민한다. 그들이 마주한 임신이라는 문제는 사실, 청년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 벗어야만 했던 이전 가정, 부모 세대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기 위해 넣은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부모 세대에게서 벗어나고,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른의 상을 찾고, 종국에는 스스로가 부모세대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불안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안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만,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름도 형체도 나오지 않는 아이는 그저 “깨었다”라는 대사로 존재의 의문을 가중할 뿐이다. 어쩌면 이 “깨었다”는, 극의 첫 씬에서 그들이 깨어야만 했던 계란처럼, 그들이 깨어야만 했던 부모 세대의 폐해, 문제점들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거부하기를 선택하고, 그 자리를 대체할 어른의 상을 발견하는 순간, 그들은 어른이 될 준비를 일정 마친 것이며, 초행길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세대 간의 대립이 등장한다. 광장의 촛불시위. 영화의 초반 수현은 집회를 위해 모이는 사람들의 인파를 뚫고 집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함께 어묵을 나눠 먹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방향을 고민하면서 광장으로 들어간다. 권력계층, 구세대의 폐해의 총합된 증거. 현세대들의 힘으로 구세대의 폐해를 이겨내었다는 증거. 현세대들의 의식이 깨어있다는 증거. 그리고 그 증거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지영과 수현의 모습에서 화면이 멈추는 순간, 영화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어떤 시작과 끝이 아닌, 과정의 길목에 서 있으며, 어떤 ‘어른’으로 자랄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건네준다.

결국 청년들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되어야 하는 어른은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여전히 ‘모르겠는데’의 상태로 청년을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그저, 조금의 어른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배달 짜장면 따위를 나누어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시행착오를 지켜봐 주고 선택을 존중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초행>이 비정규직과 내 집 마련, 결혼과 임신, 출산과 가정을 만드는 문제를 전부 녹여버릴 때, 가정사에 매달리지 않고 광장으로 나설 때, 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청년들이 기어코 해내야 하는 성장을 보았다.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의 일면을 보고, 또한 어른이 되고 있는 이들의 일면을 보고, 길의 한 가운데로 손을 잡고 들어갈 때, 일순간 화면이 멈추면서 이내 사라질 때, 영화 전반을 아우르고 있던 체념과 두려움의 정서에 작은 안정이 고개를 들이민다. 두렵고 막막한 길임은 맞으나, 함께 걷는다면 괜찮다고. 명징히 보이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해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어른이 되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초행>은 수많은 청년의 초행길에 작은 조언을 건네며, 손을 잡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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