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유스케 (배우 이와세 료) 시점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고조 시의 여름은 매우 덥다. 가끔은 이 더위가 꿈까지 찾아와 꿈에서도 나는 종종 땀을 흘린다. ’고조는 여름이 덥네요’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도쿄의 여름은 어떻습니까’라고 되묻는다. 나는 그저 웃고 만다. 도쿄에서 더 오래 살았는데도 이제 그 여름의 온도나 습도는 피부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도 내가 고조의 여름을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은 내게 몇 번이고 도쿄의 여름에 대해 물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도쿄의 억양으로 말을 하는 이방인이므로. 이 오래된 도시에서 나는 영원히 ‘새로 온 젊은이’일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녀를 만난 것도 내가 반쯤은 이방인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이방인을 알아보는 건 대체로 이방인. 그건 같은 피를 알아보는 끌림 같은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스친다. 날씨 때문이다.

‘유스케 상, 유스케 상 앞으로 소포가 왔는데요.’

 

퇴근을 앞둔 시간에, 우편물을 확인하던 직원이 나를 찾았다. ‘한국에서 왔네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자 직원이 소포를 넘겨주었다. 한국, 손님. 두 단어가 각각 다른 온도로 머물렀다. 가장 최근에 한국에서 온 손님은 1년 전, 여름에 온 영화감독과 미정씨였다. 그 전에도 한번 한국에서 손님이 왔었지. 소포가 궁금했으나 사무실에서 열고 싶지 않아 금요일 밤의 술자리도 마다하고 집에 왔다. 소포 안에는 ‘이야기를 돌려드립니다’고 써 있는 짧은 메모와 함께 두 개의 CD가 들어있었다. ‘인터뷰’라는 라벨이 붙은 CD와 ‘영화’라는 라벨이 붙은 CD. 영화 쪽이 더 궁금해 영화를 먼저 봤다. 나를 닮은 배우와 미정을 닮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였다. 마음이 좀 소란스러워져 집을 나와 걸었다. 막 노을이 진, 새벽을 닮은 푸르스름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이다. 그 날도, 이런 여름이었다.

 

인터뷰를 하던 그 때, 왜 갑자기 그녀를 떠올렸을까.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약속된 손님은 아니었다. 미정을 닮았다고도 말했지만 인상에서 문득 튀어나온 말일 뿐, 얼굴이 비슷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잠시 들른 여행자였고, 우리는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연락처를 교환하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많이 걷기는 했다. 고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안내라고 할 것도 없어 몇 군데를 보여준 다음엔 그저 같이 걸었다. 그녀는 사소한 것들에도 감탄했는데,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볼수록 무채색으로 보였던 풍경에 색이 쌓였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길들은 그날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관광이 끝나자 저녁을 같이 먹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그녀는 돌아갔다. 그 뿐이었다. 무언가 남았다면 연락처라도 물었겠지만 그런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여름, 또 다음 여름이 찾아올 때마다 짧은 여행의 기억이 불쑥 찾아오곤 했다. ‘로맨스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요..’ 감독과의 인터뷰 중에 그 말을 하고는 처음 든 생각이라 순간 놀랐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첫 고조 여행이었고, 그 이후에 나는 이곳에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대신 여행자로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나와 그녀와 고조의 영화였고 이제는 흐려진 그 영화를 나는 로맨스 영화로 기억한다. 로맨스는 못 된다면 로맨스를 꿈꾸었던 판타지 정도.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서 맥주를 주문했다. 작년 여름, 영화감독과 미정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 곳에서 함께 술을 한 잔 했다.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데에 사람들의 인터뷰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글쎄, 영화가 될만한 이야기가 있나요?’ 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감독에게 통역하지 않은 채로 미정이 답했다. ‘사소해보이지만 자신에게는 특별한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걸 이야기로 만들어서 돌려드리는 거에요.’ 미정은 미소지었다. 언젠가 이야기로 돌려받는다면 그건 분명 따뜻한 온도일 것이었다. 응원의 건배를 하고 나오자 마쯔리의 마지막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미정과 감독과 나는 그 불꽃을 끝까지 보고 헤어졌다.

기억하는 것도, 기억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도 모두 추억이다. 이제 나는 이곳의 여름에 대한 또다른 추억이 생겼다. 쌓여가는 추억으로 여행을 지속하는 마음을 다잡는다. 돌아온 이야기가 돌아돌아 그녀에게 닿는다면 그녀는 이것의 일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의 소망을 더해본다. 이 이야기가 그녀에게 닿아 어떤 여름의 추억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당신은 나에게 여름 판타지였다. 나는 당신으로 인해 여름을 감각한다. 그 여름을, 이야기를 당신에게 돌려드린다.

 

*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전성태 작가의 동명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윤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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