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歌
정가영 <비치온더비치>
가을방학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유성현
"신청곡"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

어쩜 우린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렇지 않니?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가을방학의 제목 긴 이 노래에는 겨우 '만약'이라는 두 글자로 무너지는 마음이 있다. 이어지는 것은 한때 사랑했던 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이자 단호한 결별의 통보. 연약한 듯, 강인한 문장이다. 부디, 우리의 재회는 만약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길 바라.

반면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가영’이 망설임 없이 걸어가고 있는 곳은 분명히 실재하는 장소다. 더욱이 그곳을 향하는 걸음과 표정에는 ‘만약’으로 시작하는 위태로운 의문이나 가정대신, ‘절대’의 확신과 패기로 가득하기까지 하다. ‘나는 오늘 너와 살을 섞겠다.’라는 자못 결연한 의지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습지만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도 많이 하게 돼

 

눈부신 해변에서의 로맨스가 예상되는 <비치온더비치>에서 다루는 공간이란 가영이 급습한 전 남자친구 '정훈'의-엄밀히 말하자면 정훈 부모의-아파트가 전부인데, 그녀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황망한 그의 하소연을 듣고 있자면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술을 마시고,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설사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중에도 이어져 왔을 시간이 있었을 것. 사실 이를 멱살 잡고 끌고 왔을 가영의 태도를 선뜻 공감하며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번역하기 막막한) ‘비치풀한’ 가영은 타인이 이해하든 말든 주방 식탁, 거실 소파, 방안 침대를 마치 제 집처럼 옮겨 가며 열변을 토해낼 뿐. 소심한 본인이 감히 옮겨 적기도 못할 어록을 쏟아내는 가영의 놀라운 화술에 알딸딸하게 취해갈 수록 또렷해지는 것은 ‘그녀는 왜?’라는 불가해한 의문이다.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냐

수없이 많은 나날들 속을 반짝이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영화는 연애담의 온도로 보기에는 다소 차게 식은, 일종의 '후일담’인데 흔한 회상 장면 하나 없다. 설명되지 않는 그들의 전사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괄호를 치게 되지만, 둘 사이에 생기는 공백은 어색하지 않은 공기로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편. 진짜 채우기 어려운 문제는 다름 아닌 각자의 빈 칸, 뜻밖에도 시종일관 뻔뻔하리만치 솔직하기만 한 가영의 칸이다.

순전히 본인의 상상으로 채워야 할 이 문제를 두고 꺼내 듣는 것이 가을방학의 노래. 그녀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의 노래 같았던 노래에서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한 소절이 유독 마음에 걸린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어쩜 가영이 가장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건, 정훈의 앞에서만이 아닐까 싶은 ‘만약'. 물론 한사코 잠자리를 거부하는 전 남자친구에게 "대주지 않을 거면 꺼져!"라는 험한 투정이 바로 튀어나오는 그녀라면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어디까지나 우리가 보는 가영의 모습은 정훈과 함께 있을 때뿐이었으니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 있으리라. 그녀와 달리 확신의 영역에 당당히 서있지 못하는 본인이 하는 상상의 한계는 이토록 자명하다. 도리어 이것이 마냥 자유로운 가영을 구속하는 뻔한 사연이 되지는 않을까. 괜스레 미안해지면서도 끝내 그 상상을 포기하지 못한다. 적어도 이 작은 소란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로는 들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본인에게 의미는 충분했기에. 그렇게 비로소 그녀를 이해했다 싶은 순간, 비치풀한 가영은 타인이 이해하든 말든 말없이 사라져있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가영의 마음대로.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 세상 속에

 

마침내 찾아온 평온 속에서 정훈은 혼자 옆으로 누워 '취미는 사랑'을 부르는 가영의 동영상을 본다. “미소가 어울리는 그녀, 취미는 사랑이라 하네.” 자연히 본인도 계피가 아닌 가영의 목소리로 부를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를 상상해본다.

 

많이 닮은 듯, 전혀 다른 그 노래에 그만 정훈처럼 피식 웃고야 만다.

가을방학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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