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이완민 ​<누에치던 방>

천혜윤
“당신과 만날 가능성들”

 <누에치던 방>은 분열의 이야기다. 죽은 유영이 사람들과 말을 섞고 영향을 미친다. 혹은, 유영과 닮은 얼굴의 학생일지도 모른다는 알리바이도 존재한다. 영화는 보여지는 현상과 이면의 가능성을 동시에 재기한다. 마치 해 뒤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만일의 세계>의 전제처럼. 그래서 실제로 관계한 적 없는 인물과 대화하거나, 어떤 인물과의 관계맺음이 다른 인물에 대한 정념을 대체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지하철에서 마주친 유영을 두고 미희가 소리 지르며 쫓을 때 미희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불러지는 대상은 근경이며 또한 미희의 비명은 성숙의 유영에 대한 갈망을 대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 여성 인물들은 단수로 말해지기 어렵다.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소개되는 <누에치던 방>은 내게 오히려 여성이 시간과 기억 속을 유영해 다른 여성과 어떻게 진실로 관계할 수 있는지의 복잡함에 대한 영화로 보인다. 마치 사람이 그의 마음에 심어진 타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 정도의 시간적 거스름과 반복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영화에는 두 번의 섹스가 존재하는데, 서로의 파트너가 아닌 처음 만난 상대와 이루어지고, 남성과 여성의 섹스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미희와 성숙은 낯선 남성들과 섹스하고 육체의 일치감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에 그렇다 할 연결성 없이 그친다. 이들이 정말로 일치해야 할 대상은 섹스하지 않거나 섹스할 수 없는 대상들이다. 일치되기 위해서 두 인물은 서로의 기억에 놓인 교집합들을 천천히 열어놓는다. 거기엔 고등학생인 유영과 근경이 있다. 실제로 살아있는 근경과 달리 유영은 정념이나 이데올로기처럼 존재한다. 그는 그 자체로 ‘이벤트’인 인물이다. 학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소년이나 정치적 집회를 쫓는다. 일상의 일상성을 견디다 못해 유영은 자살한다. 햇빛을 쏘아보다 눈이 먼 사람.

 미희에게는 반대의 기억이 있는데 입시 준비를 위해 친구인 근경을 외면하던 시간이다. 누에치던 공간이 개발지구가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광이지만 그 반대가 되면 부자연스러워진다. 미희는 일상적 순리를 따르고 어머니가 매 끼 챙겨주는 약식을 포장지까지 삼킨다.

 

 <누에치던 방>은 그런 미희가 애인에게 이별당하고 타인의 아파트로 찾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이들은 낯선 상대를 안는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가끔 당연한 질문도 오간다. ‘왜 나를 반겼어? 내가 네 친구가 아닌 걸 알면서도.’ 성숙은 미희의 반말을, 낯선 이의 집으로 찾아온 용기를 반긴다. 전위적 연극의 배우이며 집회에 대한 모임을 갖는 성숙처럼 <누에치던 방>은 종종 계급 혁명이나 국정 교과서 반대 시위 같은 정치적 화두들을 주변에 개입시킨다. 억압적인 일상을 변화시키려는 비일상적 투쟁의 흔적들. 이러한 화두들은 일상의 미시적 요인들로 작용하지만 거시적인 사안으로, 대단한 정치적 음모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광화문에서 미희는 선배의 차에 타고 시위하는 군중 앞에서 자동차 창문을 올린다. 검은 창문을 따라 시위자의 얼굴이 가려질 때 나는 그것이 고등학생 근경의 현신이라고 보았다. 세계는 계속해서 일상성을 유지한다. 시간으로 멀어진 사람은 다시 찾을 수 없고 학생은 입시를 성인은 고시를 준비한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가능성들도 있다. 
나는 <누에치던 방>의 인물들이 문어체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래서 좋았다. 정제되지 않은 마음의 말들. 무언가를 상징하지도 그럭저럭 수습하기 위한 표면상의 말도 아닌. 그런 잠깐의 비일상적 순간들이, 아득하게 그리워졌다. 이건 그냥 이벤트지만.

 

 저 공간이 당신의 누에치던 방이었구나 깨달은 순간이 있다. 그곳은 미희나 성숙의 방도, 그들이 머무르던 고등학교의 풍경도 아닌 미희 스스로 갇힌 창고 안이었다. 이상한 거 아니에요, 이거 그냥 이벤트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창고의 열쇠는 그의 오랜 친구인 근경의 주소로 간다. 마지막 음성을 전하고 나서 스스로 고립된 그 방에서 미희는 죽어 처음 소망을 이룬다. 뒤늦게 찾아온 근경이 장례를 치르고 성숙과 미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망자는 말이 없어서 근경에 영원한 기억으로 대신 남겨질 수 있다. 근경의 휴대폰으로 남겨진 음성들과 과거의 추억이 미희를 그릴 단서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완전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숙의 부름으로 미희는 미처 죽지 못한다. 그 때 수술실의 성숙은 예언처럼 유영과 근경에게 찾아가자고 강조한다. 모든 과거들과 이야기하자고. 그리고 정말로 다시 마주했을 때 미희에게 전해진 응답은 오래 전의 기억과 이별하라는 거절이다. 영화는 거기에서 끝난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죽지 못했고 살아서 거절당하는 일. 이벤트는 끝났고 다시 긴 일상이 찾아온다.

 유영은 몇 번이나 미희에게 발견되고 영화의 말미에 익주에게 찾아오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던 성숙과는 끝내 대면하지 않는다. 이완민 감독은 작품을 소개할 때 한 친구와의 기억에 대해 언급했다.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던 친구를 외면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살했다는 기억이었다. 감독은 <누에치던 방>이 자신이 그려놓은 흩어진 마음의 지도라고 말한다. 그 마음의 지도에서 죽은 친구와 다시 대면하기 위해 만남은 계속해서 유보되고 이야기는 에둘러진다. 다시 그와 만날 수 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그것은 원망일까, 위로일까.
그러나 그 무수한 집합들 사이에서도 살아있는 유영과 마주하는 건 단짝친구인 성숙이 아니라 미희다. (근경을 통해) 원망을 듣는 대상도, 네 삶의 증언이 되어주겠다며 위로를 건네는 대상도 미희다. 성숙은 죽은 자의 무덤만 바라본다. 성숙은 미희를 통해 유영과 대면할 때의 여러 가능성들과 만난다. 그러나 그 뿐이다. 원망도 거절도, 들을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존재에게 뿐이다. 감독은 자신 안의 죄책과 이미지들을 <누에치던 방>으로서 한 시대를 완결하고자 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답을 들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가능성으로 정념으로 계속 흩어져 있을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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