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短編’的)
김혜진 <한낮의 우리>
이채현
그렇다면 춤을 출 수밖에

 어떤 날에는 좋아하는 걸 말할 힘도 없다. 좋아한다는 말은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일텐데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일조차 힘에 부친다. 오늘도 싫은 것만 입에 올리고 말았다는 후회와 그렇게 좋아하는 게 몇 개 안 남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으로 뒤돌아서는 날에는 <한낮의 우리>의 ‘진주’가 생각난다.

 진주는 나레이터 모델이고 기다란 팔다리를 쭉쭉 뻗어가며 춤을 추고 전단지를 돌린다.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면 술에 취한 아버지와 철없는 동생 진실이 있다. 이것이 진주의 일상이고 일상은 싫든 좋든 매일 마주해야하는 자리다. 내가 매일 남긴 자국들이 나를 만든다는 말들이 어떨 땐 위로가 되지만 어떤 날은 끔찍하다. 이런 날들이 모이면 대체 어떤 날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진주가 견디는 이유는 단 하나다.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꿈. 무지개 색으로 반짝이는 조악한 에펠탑 조명과 여행 책을 보며 낯선 땅을 가늠해보는 일만이 진주에게 남은 유일한 것 같다. 유일한 것들은 대체로 유일하기 때문에 강하고 위태롭다. 이 꿈도 쉬이 위태로워지는데, 동생 진실이 학교에서 친구 도이를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고, 결국 진주의 몫이 된다. 낮게 분노하고 체념하는 진주에게 그런 일은 익숙한 것 같다.

 진주는 병문안을 갔다가 병실에서 춤을 추는 도이를 발견하고 도이는 길에서 춤을 추는 진주를 발견한다. 언니 되게 멋지다고, 언니처럼 되고 싶다는 도이에게 진주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먼저 살아본 이가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미리 일러주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은 춤을 추기로 한다. 너무나 한낮인 노래방에서 유행하는 아이돌의 노래에 맞춰 온 힘을 다해 춤을 춘다. 나와 닮은 네가 나와 같아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마 진주는 또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춤을 출 것이다. 돈은 잘 모이지 않을 것이고 프랑스에 가고자 하는 꿈은 번번이 실패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진주의 강한 얼굴은 분명 좋아하는 것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상상한다. 절망을 이기기 위해서 춤추는 사람은 도이의 말처럼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 절망을 절망하는 방법은 가장 쉽고 춤을 추며 절망과 싸우는 것은 정말로 씩씩해야하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달라는 엄마나 사고를 치는 진실처럼 어쩌면 세상은 진주를 번번이 넘어지게 하는데도 진주는 그저 엄마가 립스틱이나 사 바르라며 꾸겨 넣은 몇 만원으로 립스틱을 사 바르고, 진실에게 별 말없이 김치찌개를 끓여 내민다. 그러니까 모두 절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춤을 추지 않을 때도 진주는 언제나 춤추고 있다.

 오늘도 좋아하는 마음을 잃어버릴까봐 약해지는 마음으로 진주를 떠올린다. 좋아하는 사람은 약하지 않다고, 그건 우습게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절규에 가까운 춤을 추던 두 사람과 다시 한낮의 태양 아래 춤을 추는 진주를 생각하면서, 모르는 미래를 단언하는 건방은 떨지 말자고 다짐한다. 절망하거나 춤을 춰야한다면, 춤 출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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