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歌
"치기와 취기 사이"
정가영 <밤치기>
조정치 <사랑은 한 잔의 소주>
유성현
2019. 05. 17

나는 연인 아닌 다른 사람과 자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이런 고백에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좀처럼 알 수가 없지만, 본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선뜻 웃어 넘기지는 못 할 것 같다. 이렇게 잡혀버린 미간의 주름을 없애기 위해 수위를 낮춘다면 어디까지일까. 잠자리가 아닌 술자리까지는 용인할 수 있을까. 이조차 불편하다면 그저 이야기를 나눈 정도라면 어떠한가.

‘자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바람을 핀 거래?’ 대수롭지 않게 나온 <밤치기>의 대사에서 나름의 적정 기준선을 찾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반면 늦은 밤 여자(정가영)와 술자리를 이어가는 남자(박종환)의 생각은 비교적 명확하게 전달되는 편이었다. 남자 자신은 사수했다고 생각했을 법한 그 선, 아무래도 내 눈엔 진작에-자의든 타의든-넘어가버린 터라 그만 실소가 나왔지만 말이다. 그들이 보낸 하룻밤에 섹스는 없었지만, 과연 아무것도 없었을까.

‘사랑은 한 잔의 소주 같다고나 할까?’

마치 이 물음의 응답처럼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바로 2010년에 발매되었던 조정치의 1집 ‘미성년 연애사(美成年 戀愛史)’의 타이틀곡 ‘사랑은 한 잔의 소주’. 소주 숙취에 일어나 샤워를 하며 무심결 흥얼거린 양수경의 ‘사랑은 차가운 유혹’에서 떠올라 만들었다는 작은 사연이 있는 노래. 알고 들으니 두 노래의 전주만 들어도 꼭 닮았다. ‘사랑’과 ‘소주’의 접점에 살짝 갸웃하는 고개도, ‘차가운 유혹’이 ‘한 잔의 소주’로 대체되는 연상이라면 충분히 그럴듯하다며 끄덕이게 된다. 가끔은 무척 달기까지한, 시원한 한두잔의 느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여느 술집에 마주 앉은 두 사람도 결코 그맛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

어쩜 우린 가장 좋은 기회를 실패라는 이유로 겁내지

한 순간 틀어지면 손 놓아 버리고 상관없는 딴 핑계로 도망쳐대

그래 그건 모르는 소리야 그럴듯한 인생의 추측들

메뉴판의 그림처럼 과장된 결말,

둥근 공이 어디로 구를지 모르듯이 알 수가 없지

서로 따라준 잔이 경쾌한 소리로 맞닿는다. 사각 테이블의 시합공. 시작하자마자 여자의 질문은 저돌적이다. “오빠, 하루에 자위 두 번 해본 적 있어요?” 다짜고짜 스트레이트가 꽂힌다. 불의의 일격에 턱 막힌 남자의 말문이 간신히 떨어진다. “아, 시작한 거예요?”. 그렇다. 시작한 것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함이라는 이유를 의심하지 않는 탓인지, 쭈뼛거리나 대답만큼은 제법 성실한 남자의 반응도 흥미롭다. 물론 여자의 속내가 다른 곳에 있음을 아는 링 밖의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은, 말랑한 로맨스라기보다는 아슬아슬한 서스펜스에 가깝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의 접근이 표면적으로는 막무가내 거친 듯 보여도 그조차 본심을 직접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이토록 치밀한 여자가 기어이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라고 내뱉어버린 한 마디는 확신에 찬 회심의 일격이라기보다는 좀처럼 넘어오지 않는 상대에 대한 인내의 한계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사랑은 한 잔의 소주

끝을 알면서 또 한잔 들이키는 유혹

깨어나면 어딜지 몰라

인생은 답 없는 문제

서둘러 봐도 어차피 모두 같은 점수

오늘 하루 행복이 숙제

하지만 뜻밖에도 이러한 쇼트가 등장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노래방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의 ‘아는 형’(형슬우)과의 대화에서다. 1인칭으로 ‘오빠’라는 주어를 쓰고, 물어보지도 않은 피콜로의 피색깔로 장황한 설명을 이어가는 남자. 누군가는 더 크게 웃을 수밖에 없는 전형성을 한몸에 갖고 있는 그는, 야속하게도 (아마도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일) <봄날은 간다>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여자의 요청에 주저없이 응해줄 이미지가 자연히 그려지는, 하룻밤의 성공이 확실할 남자. 여자가 남자와 있을 때는 한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상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형이 아닌 남자에게 향하는 여자의 마음은 술기운 때문일까, 어리석은 미련일까. 끝을 알면서도 들이키는 마지막 한잔은 으레 그렇듯 쓰기만 하다.

늦은 오후에야 부시시 눈을 떠

머릴 쥐어뜯고 후회를 해보지만

오늘 밤도 들이킨다

돌아오는 것은 외롭게 식어버린 밤이 지나 부스스하게 밝은 시간. 자신의 방에서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여자가 있다. 외출을 준비하는 그녀의 옷차림과 고심 끝에 고르는 약지의 반지를 보니 깨어난 후가 아닌 잠들기 전의 낮이다. 이른 외출로 시작한 그 끝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려고 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패로 끝난 밤에 꼭 머릴 쥐어뜯고 후회할 필요는 없으므로. 그렇게 어느 날 또 씩씩하게 사랑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는 조금 얄밉지만 마냥 밉지만은 않다. 아무쪼록 가끔은 무모한 치기와 달아온 취기 사이 누군가의 귀갓길이 외롭지 않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도 괜스레 한 잔.

사랑은 한 잔의 소주

끝을 알면서 또 한잔 들이키는 유혹

깨어나면 어딜지 몰라

인생은 답 없는 문제

서둘러 봐도 어차피 모두 같은 점수

오늘 하루 행복이 숙제

조정치 <사랑은 한 잔의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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