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歌
"Dearest"
임대형 <윤희에게>
김사월 <로맨스>
유성현
2020. 02. 20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짧은 적막을 온기로 채우는 윤희의 담담한 고백을 따라 흘러 나올 어떤 노래를 눈을 감고 가만 상상해봅니다. 사뿐사뿐 경쾌한 걸음에서 이내 한달음으로 달려가고 싶어지는 그런 노래.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향하는 순간이 꼭 그럴 것만 같아서 괜스레 두근거리게 되는 곡. 김사월의 두 번째 정규앨범 [로맨스] 속 동명의 첫 번째 트랙입니다.

내 마음 받으러 올래?

난 운전은 못하니 네가 가지러 와

엄청 많으니까 아무 때나 찾아와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이곳은 너와도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도착한 편지는 다른 곳에서 죽어가듯 살던 윤희의 손을 단숨에 붙잡아 당깁니다. 지금 여기가 아닌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무릇 설레는 일이겠지만, 이 편지가 윤희의 마음과 몸을 움직인 까닭은 단지 편지의 발신지가 겨울의 오타루라서가 아닙니다. 그녀는 아마도 여름의 가마쿠라라고 해도, 심야의 프라하나 한낮의 파리라고 해도 바로 향했을 테지요. 왜냐하면 자신과 어울릴 ‘이곳’으로 호명하는 이가 다름 아닌 쥰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받으러 올래?’ 윤희의 일상에서 불쑥 찾아온 쥰의 안부는 이런 손짓과 다를 바 없습니다. 때문에 어디로부터 단순히 ‘떠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영화의 첫장면을 다시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여행의 기대 이상으로 벅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연인의 옆으로, 오렌지빛 노을처럼 아련한 사랑의 시절로 ‘돌아가는’ 길이니까요. 단 한 통의 편지로 요동치는 윤희의 마음에 애틋해지다가, 동시에 겨우 한 통을 부치지 못 했던 쥰의 마음에 가여워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랑 보다 먼저 넌 나를 사랑하라 했잖아

너도 그거 못하잖아

우리를 돕고 싶어

세상에게 인정받지 못 하고 그저 함께 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을 십대의 소녀들, 떨어져 지낸 20여년의 시간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 공감한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리워해봐라며 작별의 키스는 했을까, 부둥켜 안은 채 엉엉 울 기회는 가졌을까. 남겨진 한 사람은 강제로 정신병원에 다니고 떠밀리듯 결혼해야만 했고, 떠난 한 사람은 흐르는 반쪽의 피를 숨긴 채 홀로 사는 편을 택합니다. ‘사랑 보다 먼저 넌 나를 사랑하라 했잖아’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너도 그거 못하잖아’ 정작 나를 사랑하기는 힘들었을 시간이었을 겁니다. 서로를 돕고 싶지만 연인에게 너무 멀어져 버린 지금.

그러나 이제 그들의 곁에는 영화에서 묘사하지 않은 사나웠던 그때에 대한 보상처럼 상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살가움으로, 고즈넉한 겨울밤 SF소설에 푹 빠져 있는 마사코 고모가 내리는 커피와 필름 카메라로 셀카를 찍는 엉뚱한 소년 경수가 기워낸 털장갑은 직접 맞닿은 적이 없음에도 왠지 나란히 두고 싶어집니다. 제자리에 있는 그들이 보여준 딱 그만한 온기로도 미소짓기에는 충분했거든요.

왜 넌 나를 사랑하지 못해?

우리 사랑해야 해 네가 기쁠 만큼

어떻게든 너를 행복하게 할 거야

그리고 새봄이 있습니다. 윤희가 바라보는 새봄은 어땠을까요. 조금 가혹하게 말하자면, 새봄은 자신이 끝내 실패한 사랑으로 찾아온 존재입니다. 영화의 초반부 딸의 질문에 자식 때문에 산다는 평범한 엄마의 대답이 어쩐지 더 절망적으로 들리는 건 아마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요. 오타루로 떠나기 전 모녀의 냉랭한 대화는 마치 웃지 않는 거울을 보며 ‘왜 넌 나를 사랑하지 못해?’ 묻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볼 때만 닮아있을 뿐 아니라 모르는 곳에서도 닮아 있지요. 졸업 후 떨어져 지낼 새봄과 경수의 미래는, 그 나이대 윤희와 쥰의 과거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새봄이 윤희뿐만이 아니라 쥰과도 접점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부모의 이혼을 지켜보며 함께할 사람을 택한 이유에서, 서로 반대의 방향이지만 사람을 안아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렇듯 새봄은 윤희와 쥰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투영하고, 그러면서도 또 오롯이 자신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우리 사랑해야 해 네가 기쁠 만큼’ 다짐한 듯 영화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분주히 움직이고, 씩씩하게 웃는 소녀. 윤희는 자신의 옆모습을 찍는 새봄이, 인물사진은 안 찍느냐는 삼촌의 물음에 아름다운 것만 찍기 때문이라 차갑게 받아쳤던 사실을 알까요. 쥰은 겨울밤의 재회를 지켜보고,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까요. 아무렴, ‘어떻게든 너를 행복하게 할 거야’ 김사월의 목소리가 어쩐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합니다.

사랑 보다 먼저 넌 나를 사랑하라 했잖아

너도 그거 못하잖아

우리를 돕고 싶어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매년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동네라도 막연하게 떠올리게 되는 물음처럼 내리는 눈 속에서 몇 번이고 나오는 저 말은 쌓이는 그리움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쌓여서 치우고, 치워도 또 쌓이는 막막하고 먹먹하게 덮이는 오타루의 풍경. 그런 영화와는 반대로 올 겨울의 서울은 좀처럼 눈을 보기가 힘들었네요. 이 기다림을 말로 표현하자면 “눈은 언제쯤 내리려나.”가 될까요. 그치지 않는 눈과 내리지 않는 눈, 정말로 자연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가득한 어떤 마음들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전혀 다른 풍경의 겨울이더라도 결국 새 봄이 온다는 사실은 마땅히 당연하면서도 또 얼마나 다행한지. 어느 날 윤희에게 찾아온 쥰의 편지처럼, 언젠가 쥰에게 돌아갈 윤희의 답장처럼 말이죠.

추신. [로맨스]의 전곡을 들었으면 하는 마음을 숨겨두었습니다.

김사월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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