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短編’的)
부은주 <5월 14일>
이채현
어디에 흘린 마음이 누구에게 따뜻함이 되는 지도 모르고

 악의는 없지만 공교로운 날들이 있다. 먼저 결혼하는 동생이 받아온 날은 공교롭게도 5월 14일, 민정이 서른 살 되는 생일이다. 그날 내 생일이잖아, 그냥 그렇다고 말을 꺼낼 때 민정은 정말로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일이 뭐 대수냐고 뭉개는 말은 생일인 사람만 할 수 있다. 생일은 이상한 날이다. 누군가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으니 소중하게 대해달라고 했지만, 차라리 멜랑꼴리의 날이라는 말이 훨씬 와 닿는다. 특별히 행복할 일은 없지만 특별히 서글퍼지기는 쉽기 때문이다.

 민정은 종일 동생에게 쏟아지는 축하의 말들에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이 담겨있을까 문득문득 기대하는 자신이 초라하다. 기쁜 날 축하만 하고 싶은데 얼굴에 자꾸 서리는 그늘은 오롯이 민정의 몫이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옷을 입냐는 핀잔이나 오래 사귄 남자친구를 탐탁지 않아 하는 부모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른을 맞아야 한다는 불안 같은 것은 적어도 생일에 상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차라리 정말 대수롭지 않고 싶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만 잠깐 비추고 사라진 남자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도 잠시, 그래도 오랜만에 손편지를 쓰니 좋았다는 말에 민정은 허겁지겁 케이크를 두고 온 절로 달려간다. 딱 하나의 진심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하루에 민정에게 필요했던 건 진심 하나뿐이었으니까. 그토록 절실했던 뜀박질 뒤에는 맥이 빠질 정도로 짧은 문장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수백 장 찍혀 나오는 카드에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적혀있는 말 ‘생일 축하해’. 하루 동안 쌓아온 마음이 두서없이 무너져내린다. 백 개의 마음이 필요할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개면 되는데, 아흔 아홉 개의 마음을 가지고 외로워하는 일은 더욱 외롭다.

 내일 출근하라고 닦달하는 상사와 남자친구에게 마음을 쏟아내고도 민정의 마음에서 털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열에 가득 찬 채로 낯선 동네의 작은 슈퍼에 들어가 계산을 하려는데 주인 할머니가 참 곱네, 하며 약과를 하나 내민다. 얼떨결에 고맙다고 말하는 민정의 얼굴에 얼떨떨한 따뜻함이 번진다. 절의 연등도 꺼지고 슈퍼 할머니도 언제나처럼 문을 닫는 시간. 식어버린 밤바람처럼 어찌 되었든 민정의 서른 살 생일 하루도 공평하게 저물어 간다. 문득 민정의 느려진 걸음이 눈에 밟힌다. 그러니까 다들 자기가 흘린 마음이 누구의 어떤 하루를 구원했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우리가 그렇게 모르는 채로 서로를 구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기쁠 수 있다. 나는 영영 모를 내가 흘린 따뜻함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누군가 흘린 마음을 주워 먹고 사는 나를 생각하면서.

© 2023 by Andy Deck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