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신동석​ <살아남은 아이>

천혜윤
“속죄의 방법”

 불행한 피해자에 대해 우리는 많이 말해왔고 들어왔다. 영화매체는 벽처럼 둘러싸인 불행 한가운데 있는 선량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일이 우리 안의 인간성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가장 익숙한 예는 나쁜 어른과 약한 아이의 대비일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어른 혹은 권력자가 보호와 존중이 필요한 아이 혹은 소수자를 착취하거나 방관하는 일. 그 반대일 때, 그러니까 좀 더 의외의 상황으로 좋은 어른과 나쁜 아이의 이야기가 된다면 나쁜 아이는 교화의 대상이 되거나 오리무중한 미스테리로 대상화되기 쉬울 것이다. 흔치 않은 일에 쉽게 놀라고 빠르게 단정 지으려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는 더 가깝다. 그러나 그 본성에 어긋나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좀 더 복잡한 존재로 만든다.

가령 <살아남은 아이>의 나쁜 아이 ‘기현’과 좋은 어른들인 ‘은찬 부부’의 관계가 가진 복잡함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하는 일은 왠지 옳지 못하게 느껴진다. 은찬 부부의 아들은 평소 그다지 가까워 보이지 않았던 학급친구 기현을 물속에서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부부는 사건에 절망하고 아이를 원망했다. 하지만 그 아이, 기현이 막연한 불행 속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면? 좋은 어른인 은찬 부부는 기현의 오랜 불행과 기현을 통해 상기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원망 속에서 부부 각자의 시작점은 달랐으나 같은 결말에 이르기로 선뜻 동의한다. 그것이 영화의 첫 번째 결말, 가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장면까지의 결론이다. 러닝타임의 거의 정확한 절반 지점에서 세 사람은 대안 가족의 형태로 함께 소풍을 떠나고 마침내 긴 애도를 잠시라도 쉬어가는 듯 즐거운 풍경 속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애도의 방식에 있어 은찬 부부는 줄곧 다른 곳을 가리켜왔다. ‘성철’과 ‘미숙’은 직장에서의 역할에 분명한 차이를 두듯 사람과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대비되는 파트너이다. 그간 두 사람의 관계를 하나로 꿰어왔던 것은 아들 은찬의 존재였을 것이다. 은찬을 잃은 후 미숙은 은근한 분노를 껴안은 채 성철을 거부한다. 두 사람 중 먼저 같은 방에서 잠들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내비친 것은 미숙의 몫이었을 것이다. 미숙의 눈에 성철은 아이를 잃은 부모라기에는 너무나 태연하다. 그는 작업 현장에서 능숙한 손길로 벽재를 마감하는 것과 같이 은찬의 의사자 지정과 장학 재단의 설립을 성실하게 준비한다. 그는 성실한 만큼 머릿속의 무언가를 잊으려는 사람 같다. 바로 그 지점이 미숙을 괴롭게 만든다.

미숙은 새로운 아이를 가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랐을 때 은찬의 이야기를 모두 해줄 것이라 말한다. 아기는 은찬의 흔적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흔적 그 자체다. 또 미숙은 아들의 방에 남겨진 물건들을 단짝이었던 ‘준용’에게 선물해주고자 한다. 망자의 물건을 받고서 기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미숙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준용이나 기현이 은찬의 물건을 받아들고 그것을 간직해주기를, 은찬이 타인에게 남겨지고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기현은 성철에 의해 구조되듯 은찬 가족의 곁으로 왔지만 더 깊은 애착을 나누는 것은 미숙 쪽이다. 기현은 아마도 영원히 은찬의 자장 안에 있을 것이다. 기현만큼 은찬을 기억할 수 있는 대상은 없을 것이다. 미숙은 그 시점에서 이미 기현의 모든 것을 용서한 인물처럼 보인다.

 

선은 악을 알아볼 수 없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은찬 부부는 악의에 대해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부부는 은찬의 세대가 어떤 악의와 폭력의 현장인지 알고자 노력하지만 분리된 세대 속에서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두 입을 닫는다. 입을 여는 것은 대안가족으로 합류한 기현이다. <살아남은 아이>의 두 번째 결말, 그러니까 진짜 결말은 그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기현은 은찬이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해 매우 자세하고 집요하게 술회한다. 소년들의 집요한 악의에 대해, 살아남으려던 소년의 마지막 몸짓에 대해.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죄송하다거나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쉬운 방법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성철과 기현의 만남을 생각해본다. 기현은 어른의 용돈을 머뭇거림 없이 받아들인다.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는 성철의 연락처로 손을 뻗었고, 그가 제공해주는 모든 보호와 걱정까지 받아들인다. 그들은 연고 없는 어른이며 피해자의 부모이지만 생리적인 불편함이나 부채감을 느끼기에 기현의 일상은 너무 필사적이다.

은찬 부부와 가까워지며 그는 어느새 자신이 은찬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알게 된다. 세 사람은 함께 소풍을 가고 사진을 찍는 일이 자연스럽다. 성철과 미숙의 생일을 알고 싶다는 기현의 소망은 부부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준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너무나 안온한 삼각형 안에서 은찬을 체험한 기현은 비로소 악의의 메스꺼움을 본다.

어째서 모든 악의들은 그토록 악의적인가. 악의는 악의를 보지 못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폭력의 당사자였던 다른 아이들과는 의도적인 거리를 둔다. 은찬 부부가 그랬듯 영화는 악의 정체에 대해 가까이가지 못한다. 대신 영화의 기능, 인물의 안쪽으로 들어가 내가 아닌 타자를 경험하는 일이 속죄의 방법과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죄 많은 소년’ 기현은 은찬이 받았던 사랑과 은찬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낙차를 동시에 체험한다. 가해자의 피해자 되어보기는 가장 어렵고 무거운 속죄다. 기현은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속죄로서 은찬의 마지막을 좇기를 선택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앞으로도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4)>과 완전히 분리된 채로 언급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들(2004)>이 <살아남은 아이>의 모태라면 이창동 감독의 영화<시(2010)>는 가장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는 작품이다. 가해자 소년의 보호자를 주인공으로 한 <시>는 보호자 ‘미자’가 죽은 소녀의 궤적을 밟아가며 소녀와 연결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자가 선택하는 최후의 속죄 역시 기현의 그것과 같다. <시>의 결말은 윤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 대답은 차가운 물속에서 이루어진다. <살아남은 아이>의 인물들은 물에서 빠져나와 볕의 가까이로 간다. 성철과 미숙은 그들의 가장 강렬한 소망-물속의 은찬을 구해내는 일-을 은찬이 된 기현으로서 실현한다. 숨을 토해내고 있는 세 사람의 엔딩이 모호하고 안전한 선택이라는 평가에 대해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근래의 한국영화 중 <살아남은 아이>의 엔딩은 가장 희망적이고 그래서 위험하다. ‘좋은 어른은 나쁜 아이를 영원히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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