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먹고 마신 것들

박근영​ <한강에게>

차한비
허기진 밤에는 친구들과 막걸리를

진아(강진아)는 시인이다. 첫 시집의 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오래된 연인 길우가 사고를 당한다. 방금 전까지 함께 이불을 걷고, 밥을 해먹고, 언성을 높여 싸우던 애인이 난데없는 침묵에 잠기자, 진아의 일상도 스위치를 내린 듯 고요해진다. 두 사람이 만난 10년 동안, 연애는 이벤트가 아닌 생활로 자리 잡았다. 삶에서 결정적인 대목을 지켜보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귀퉁이를 돌봐주었다. 서로가 서로의 곁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던 연인이 병실에 누워 세상을 떠나갈 때, 진아는 어디서부터 슬픔을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사랑을 잃은 것과 쓰는 일 사이에는 마땅한 접속사가 없다. 순접도 역접도 불가능해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 애인이자 친구이며 동료이자 가족이었던 길우의 부재는 진아를 갑작스런 공백과 마주하게 한다. 빈 집에서 진아는 종일 자고,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어렵게 시를 붙잡는다. 상실과 창작은 개별적인 사실로 나열되지만,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현재형의 경험이기에 자꾸 엉키고 만다. 바닥을 덮은 흰 종이와 검은 글씨를 바라보며, 진아는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다. 슬픔은 가늠되지 않고 시는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헤매는데, 집 밖으로 나가면 관성처럼 일상이 진행된다. 진아는 시 수업을 하고, 낭독회에 참석하고, 편집자를 만난다. 사정을 알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답하지만, 살아 있는 채 죽어가는 연인과 보란 듯이 돌아가는 세상 틈에서 종종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한다. 진아가 겨우 속마음을 내비치는 순간은 한밤중 친구들과 술자리에 둘러앉을 때다. 진아를 알고 길우를 아는, 연인의 공통분모인 친구를 만나서 상 위에 술병을 가득 쌓아두고 나서야 “안 괜찮아”라는 고백이 터져 나온다.

​안 괜찮은 대로 취해도 괜찮으니까

오랜 연인이 그러하듯, 진아와 길우의 공유 목록에는 친구들도 포함된다. 내 친구와 네 친구의 경계가 섞이면서, 상실은 진아 혼자만의 경험으로 남지 않는다. 진아가 길우를 잃듯 그들도 길우를 잃는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길우가 얼마나 좋은 애였는지 알지? 우리가 어떻게 만나왔는지 알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은 단지 길우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와 보낸 시절에 관한 공통의 기억이 된다. 슬픔을 무마하거나 불행을 경합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 앞에서 진아는 비로소 취할 수 있다. 그때 등장하는 술은 막걸리다. 도수가 낮아서 오래 마시기에 좋고, 빈속에도 너그러운 술이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마시기에, 낯선 사람보다는 진득한 사이에 어울린다. 진아는 함께 병실에 다녀온 친구 기윤(한기윤)을 불러낸다. 늘 셋이 붙어 다녔기에 빈 자리는 유독 선명하게 느껴진다. 희고 묵직한 탁주가 속을 데우면, 눈가가 붉어진 진아는 자신을 탓한다. 그날 우리는 싸웠다고, 헤어지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연애였기에 길우는 더없이 특별한 연인이었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발맞추어 겪어온 두 사람에게 미래란 약속도 맹세도 불필요한 시간이었다. 헤어져서가 아니라, 헤어짐을 떠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아는 괴롭고 또 외로워서 취한다.

허전한 속을 채워주는 마음의 맛

막걸리는 서민적이라든가 토속적이라는 수식과 더불어, 어딘지 모르게 ‘올드’한 취향을 반영하는 듯 여겨진다. 아마 전통주라는 이유보다도, ‘막’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단어들에서 느껴지는 투박함 때문일 것이다. 막 걸러낸 술이라는 뜻답게, 막걸리는 곱지 않고 텁텁한 뒷맛을 남긴다. 한편 막걸리는 배부른 술이기도 하다. 취기가 오를 즈음이면, 헛헛했던 속이 그새 은근히 달래져 있다. 친구 고운(전고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런 막걸리와 닮았다. 고운은 진아를 집으로 불러들여 음식과 술을 내어주며, 고운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위로를 전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멀어질 때가 있다고 다독이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잠언 대신 세상에는 “지나가지 않는 비극”도 있더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잃고 쓰며 홀로 버티는 진아의 안간힘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진아는 말없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킨다. 잃기 전에는 무엇이 기억될지 모른다. 어떤 장면이 저주처럼 발목을 잡을지, 오래도록 머무를 비극이 될지 알 수 없다. 진아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을, 어쩌면 사는 내내 지녀야 할 허기를 잠시나마 채우려고 막걸리를 마신다. 고운은 진아의 씁쓸한 뒷맛을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쓸어내린다. 진아는 짧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상실을 견디는 연대는 그렇게 깊은 밤, 배부르게 취해 확인된다.

 

꿈에서 연인은 무사하고, 언젠가 강변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소리 없이 아름답다. 술과 잠에서 깬 진아는 옆이 비워진 침대에 모로 누워 울음을 터뜨린다. 낮과 밤이 교대한다. 몸을 일으키는 행위에도 한숨이 필요하지만, 결국 의자를 끌어당겨 책상 가까이 앉는다. 기억하기란 망각에 저항하는 일이기에, 부재 앞에서 진아는 시를 쓰고 엮는다. 지나가고, 지나가지 못한 후에 강물 같은 시간이 남을 것이다. 아무데도 도착하지 않으며 어김없이 돌아오는, 그리하여 계속해서 흘러가는 시간은 진아가 애도할 몫이다. 진아는 첫 시집을 펼쳐 맨 앞장에 서명한다. 이별하지 않았으나 영영 이별한 애인의 이름도 적는다. 그와 성이 같으므로 이름만 조심히 놓는다. 강 진아 길우. 하나의 강 옆에 진아와 길우가 함께 서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강처럼 긴 시간을 마주하며, 슬픔은 시작된다.

[레시피] 허기진 밤에는 친구들과 막걸리를

1. 대화 중간에 말이 끊겨도 편안한 친구를 부른다. 오늘은 좀 취할 것 같다고 미리 양해를 구해놓는 편이 안전하다.

2.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 <한강에게>를 보러 간다. 시시각각 더해가는 배고픔을 느껴보자.

3. 극장을 나와서 (늦게까지) 술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4. 막걸리와 안주를 푸짐하게 주문한다. 막걸리는 거의 모든 안주에 관대하다. 진아는 메밀국수와 전병, 매콤한 볶음요리를 먹었다.

5. 오래 양껏 먹고 마신다. 슬픈 일, 화나는 일, 오래된 일, 요즘 벌어진 일에 관해 주고받으며 봄밤을 만끽한다.

6.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정성스레 추억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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