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한가람​ <아워 바디>

천혜윤
“달리는 여자, 달리지 않는 여자”

8년차 행정고시생인 자영의 책상은 빼곡한 책과 메모들로 가득하다. 자영은 그 책상에 가구처럼 오래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리 친밀하지 않은 애인과 무감동한 섹스를 하고나서 애인은 공무원은 되지 못해도 사람처럼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조언과 비난 그 사이 어디쯤에 놓인 말을 남긴 채 떠난다. 그 말 때문이었는지 자영은 갑자기 오랜 달리기를 멈추기로 결심한다. 주변에선 이유를 묻지만 대답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답이 너무 간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달리기엔 숨이 필요하다는 것, 호흡이 더 이상 남지 않았을 땐 멈춘다는 것. 더 이상 달린다면 살아있을 수 없단 걸 몸의 감각으로 먼저 깨달아버리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만다는 것. 그때 자영의 삶에 ‘달리는 여자’가 불쑥 찾아온다. 땀이 흐르는 근육을 가진 여자의 몸. 그 몸으로 경쾌하게 건네주는 작은 맥주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안고 있는 그 몸의 주인은 달리기 동호회를 7,8년째 이어가고 있다는 현주다. 긴 산책로를 동물처럼 가뿐히 달리는 현주의 뒤를 쫓다가 자영은 함께 달리기 시작하고, 고통스러운 달리기 끝에 현주가 미심쩍게 뒤돌아보았을 때 꺽꺽대며 오랜 울음을 토해낸다.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그 이후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자영은 타인의 몸을 흘끔 관찰한다. 어린 동생의 짧은 교복 치마나 현주의 몸 근육을 선망하는 시선은 그의 몸이 유령처럼 비어있음을 보여준다. 오직 한 가지 목적만으로 추동하던 삶에서 벗어났을 때 자영은 ‘그냥 여기 있는’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만질 수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살아있음 자체를 증명하는 몸을 타인과 비교하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한다. 어디에서도 할 수 있고, 도구가 필요 없어 우리의 몸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운동으로서 달리기는, 가족들에게 으레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살이 빠졌다’는 표면상의 이유보다는 몸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 자영이 스스로의 몸의 가능성을 확대시키는 또 하나의 ‘운동’은 섹스다. 초반부의 애인을 제외하면 자영은 영화 속에서 두 남성과 매우 충동적인 잠자리를 가진다. 두 번의 섹스 모두 남성들이 건넨 특정한 말이 계기가 된다.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든가 ‘건강해 보인다’와 같은, 자영이 스스로를 긍정하게 만드는 어떤 단어들을 건드는 순간, 불빛이 탁 켜지듯 상대와 섹스하기를 선택한다. 달리기도, 섹스도 자영에게는 얼마나 달릴 수 있는 지, 얼마나 타인과 육체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지의 실험이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조건들로 이루어진 회사의 면접이나 구직 활동(31세의 여성은 구직을 할 수 없다는 보편적인 룰과 같은)과 달리, 이러한 몸의 실험에는 한계가 없다. 일회적인 섹스와 달리기는 어느 쪽이 특정하게 건강한 것도 불온한 것도 아닌 채로 자영의 일상 속에서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굴러 간다. 하지만 자신의 몸과 가까워질수록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배척된다. 이를테면 <아워 바디>의 문제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사 부장과의 섹스로 인해 자영은 ‘인턴이 되기 위해 상사와 잠을 잔’ 흔한 소문 속 여성이 되어 버리지만, 그것이 순수한 욕망에 의한 것임을 밝혔을 때 오히려 더 심한 비난을 받는다. 오래 준비한 시험을 치르지 않거나, 인턴 면접에 지원하지 않는 것처럼 삶을 유효하게 만들 모든 합리적 시도들을 포기하는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모두가 끝없이 달리고 있는 원형의 경기장에서 이탈한 그는 달리는 청춘의 대안일까.

‘넌 달릴 때 무슨 생각을 해?’ 환상 속에서 자영은 사라진 현주에게 묻는다. 커다란 집과 좋은 직장, 계속된 달리기로 단련된 몸. 무엇을 위해 달리는 지, 어떤 남자와 자고 싶은 지 현주에게는 언제나 원하는 것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의 방에는 누구도 찾지 않는 소설들이 있다. 현주의 뒤에서 달리던 자영은 달리는 그가 끝내 멈추게 되는 순간까지 목격한다. 자영은 현주의 살갗을 만지는 꿈을 꾸면서 애도에 잠긴다. 달리기는 삶을 위한 추동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위협 속에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그는 살아있고 싶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하게 될 지도 모를 사회로의 편입을 계속 포기한다. 그렇게 사라진 동료를 애도하고, 살아남겠다는 선언이다.

<아워 바디>는 2030 청춘의 절망과 수난을 그린 동시대의 많은 한국 영화/드라마와 비슷한 시작점에서 출발한다. 행정고시, N수생, 가족과의 불화, 동호회, 인턴, 면접 등 같은 소재를 취하되 정상시민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지 않는 점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또 여성이 자신의 몸과 가지는 기묘한 관계성,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 밖에 있었던 육체의 욕망을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 남성 서사로서는 불가능한 여성 영화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 일반을 ‘성적 욕구를 제어하기 어려운’ 존재로 묘사하면서 남성의 몸에 대한 욕구의 발현을 지나치게 장려하는 것을 떠올린다면) 결말에서 자영은 커다란 호텔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남성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위무한다. 다음 선택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의 결말이 비판받았던 방식과 같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영을 두고서도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소공녀> 속 ‘미소’의 엔딩이 환상적 소망이라면 붙잡을 사다리 하나 없는 자영의 현실적 삶은 더욱 절망적이다.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 있는’,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자영의 결말은 비극일까, 희망일까. 어쨌든, 자영은 더 이상 달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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