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유은정 <밤의 문이 열린다>

천혜윤
“유령에게”

<밤의 문이 열린다>의 ‘혜정’은 두 번의 밤을 보내고 유령이 된다. 공장 동료인 ‘민성’의 고백을 거절했던 밤, 혜정은 먼저 방의 불을 켜고 창밖을 확인한다. 형광등 빛은 깜박거리다 이내 멎고, 어둠 속에 민성은 사라져있다. 선물 받은 노란 꽃다발은 고백만큼 무용해서 손닿을 일 없이 멈춰있다. 목적이 전부가 된 혜정의 낮은 목적 없는 밤보다 더 깊이 잠들게 하고, 다시 찾아온 밤의 거리에서 발견한 소녀는 돌연 사라져 목소리로 남아 그를 부른다.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속 유령이란, 비유를 넘어 실재하는 현상이다. 타인과 접촉할 수 있고, 말을 걸 수도, 심지어는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모든 감각은 남아있는데 그의 존재만은 비어있다. 존재하지만 그곳에 없다는 공백의 감각은 민성과 소녀가 부재했던 자리처럼 혜정의 일상 속에 잠재되어있다. 공백의 징후들이 남긴 자리를 망연히 지켜보던 그는 결국 유령이 된다.

영화는 혜정이 죽은 자신을 발견하는 시퀀스를 꿈속의 풍경처럼 번져놓는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안도하며 그는 새 형광등을 살 의지를 가진다. 민성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밤, 형광등 불빛이 끝내 어둠 속에 잠긴 것은 빛이 그의 부재를 더 환하게 비출지 모른다는 공포와 닿아있는지 모른다. 그때 반짝이다 사라지던 빛은 그래서 자포자기한 혜정을 닮았다. 새 형광등을 쥐고 이제 자신의 고독을-거기에 누군가 사라져있을지 모른다는-마주하겠다는 용기를 내는 순간은, 다시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과 겹쳐지며 스러지고 만다.

영화는 이후 구체적인 두 개의 살인사건의 내막을 밝히며, 어떤 인물이 어떤 동기로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명시함으로써 혜정의 죽음을 관념적 사건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혜정의 옆방에서 동거하는 젊은 여성 ‘효연’은 이야기에 새 시점을 더하는 인물이다. ‘막 뛰어다니고 싶어.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니고 싶어. 이대로라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범죄를 저지르고 언니의 좁은 방 안에 숨어 지내야 하는 효연은 비어있는 일상 속의 혜정처럼 억압되어 있다. 소리 지르고, 욕설하고, 막다른 길에서 생존하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효연은 혜정의 숨겨진 분노와 욕망을 대리하는 옆얼굴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고백하면서 커튼 속으로 존재를 숨길 때 효연은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다. 타인을 거부하거나 혹은 먼저 침입하는 방식으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일상은 모두 유령의 것이다. ‘나는 텅텅 비어있고 무기력한데 …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쪽지를 남긴 밤의 혜정이 사라지기를 소망할 때, 이튿날 밤 ‘너 같은 건 살아있지 않아도 되잖아’라는 효연의 겁박은 혜정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살아 있어도 괜찮을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삶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살아서는 대답할 수 없었던 질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삶이 끝나고 되짚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에서야 비로소 호응하게 된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닫힌 문의 안쪽에 있는 존재에 대해 묻고 염려하는 영화다. 사건이 벌어지던 밤 혜정의 닫힌 문틈으로 비치는 형광등 불빛의 반짝임은 구조의 신호와 닮았다. 불빛의 반짝임도, 구해달라는 목소리도 독백으로 그치고 말 때 어린 ‘수양’만은 혜정의 목소리를 듣는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혜정의 소리에 두려워하던 수양은,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와 말을 건넬 때는 조용히 화답한다. 수양의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온 혜정은 그가 처한 곤경과 고독을,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을 목격한다. 유령이 된 이후에야 혜정은 타인에게로 공포 없이 들어설 수 있게 되고, 보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의 불완전함을 온전히 볼 수 있다. 연민하는 목격자인 그는 유령의 존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유령, 카메라의 시선을 닮아간다.

영화는 결말을 통해 혜정 스스로는 알지 못했으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연결될 수 있었던 순간의 장면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서사의 바깥에 있고 혜정의 기억 속 일부에도 남아있을 것 같지 않은 사소한 순간 속의 온기와 가능성을 영화는 붙잡는다. 죽어있고 사라져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순간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순간이 우리를 유령 아닌 것으로 만들까. <밤의 문이 열린다>의 마지막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 관객들을 자신의 기억 속 어느 곳으로 잠시 되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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