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립영화外인이다
1막 <그거 다 꿈이야>
2017. 08. 10
​진은영
1장  "이런 첫사랑도 있다"

 요즘만큼은 아니지만 못지 않게 푹푹 찌던 2008년 여름, 기말고사도 끝난 마당에 방과 후 수업시간에 고등학생이 하는 일이라곤 책상에 늘어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진작에 이러한 사태를 예감한 선생님은 영화를 한 편 보자고 하셨다. 반응은 미지근했다. 수업 시간에는 수업 빼고 다 재미있다지만 사실, 학교 선생님이 보여주는 영화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건전하고(재미없고), 교훈적인(재미없는), 때로는 차라리 수업을 갈망하게 하는 문학적인(어렵기까지 한) 영화들. 지금은 눈물 쏟으며 인생 영화네 명작이네 외치는 작품들도 자극적인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 내겐 지루할 뿐이었다. 비록 훈훈한 외모에 센스까지 겸비한 선생님이었지만 취향까지 완벽할 순 없다며 심드렁하던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화는 역대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 2위(2007 기준)에 빛나는 작품이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명실상부 최고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였다.

 

 처음에는 정말 많이 웃은 기억 뿐이었다. 나와 같은 고등학생 소녀가 하는 행동이 너무 웃겨서, 풋사랑이 간지러워서 계속 웃기만 했다. 그런데 그 날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이후에도 영화가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신 없이 웃었던 그 날의 기분이, 소중한 것을 지키려 온몸을 던지던 마코토에게서 느꼈던 먹먹함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온 몸 가득히 차오르고 있었다. 분명, 사랑이었다. 어떤 경험은 그 경험을 하기 전의 나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특히 10대 시절엔 책의 어떤 구절이, 영화의 어떤 장면이 그대로 날아와 박히는 순간들이 반드시 온다. 내겐 그 날이 그랬다. 그렇게 난 영화의 세계에 홀리듯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로 얼마나 많은 영화들을 찾아봤는지는 모른다. 동영상 파일이 재생되는 MP3 플레이어를 한 순간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을 외우다시피 보고 들었다. 그리고 가끔 이미 늦어버린 진로 선택에 속상해하며 자책하는 밤이 있었다. 왜 진작 예술에 눈을 뜨지 못했을까, 중학교 때 알았다면 예술고등학교에 지원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일생일대의 기회를 이미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끝없는 우울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다짐했다. ‘대학만 가면 극장에 살 거야’, ‘대학만 가면 영화 공부를 할 거야’, ‘반드시 영화인이 될 거야’.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이미 지나치게 행복했다.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다. 더욱이 적극적인 의사결정의 경험이라고는 문구점에서 펜을 고르는 것이 전부였던 한국의 평범한 고등학생에겐 공상에 잠기는 것만이 꿈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영원할 것만 같던 수험 생활도 끝나고 대학생 신분을 얻는 데 성공하자마자 난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끼어들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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