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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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graphy
"김민범"
<혜화,동>
사진: 유수진
​글: 김민범

조금 더 근사한 실패를 기대했다. 무수한 실패를 마주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앓으면서 새해를 시작했다. 원인 모를 몸살로 열흘, 또 장염으로 열흘을 아프고 나니 1월이 끝나간다. 자다가 지치면 밥을 먹고, 먹고 나면 다시 졸렸다. 꿈꿀 시간도 없었다. 엉성한 날들이었다. 성기던 계획들이 촘촘해졌고, 지키지 못한 일들이 도둑눈처럼 쌓였다. 새 일기장에 적기 아까운 시작이었다.


걱정됐다. 카메라 앞에 서면 항상 굳는 어깨와 덥수룩한 몰골이 신경 쓰였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 피해를 주는 건 아닌가 싶었다. 호기롭게 뱉었던 말을 줍고 싶었다. 영화를 정하면서 더 아프면 못 찍을 수 있겠지, 불온한 생각을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만일의 세계>, <최악의 하루> 여러 영화를 이야기했다. 중절모가 없거나 격정적인 춤을 출 자신이 없다거나 각각의 이유로 탈락했다. <최악의 하루>로 정했다. 하루가 아니었지만, 최악이라는 말이 시절과 어울렸다. 한예리가 불었던 풍선껌 크기를 만들 적정 껌의 개수에 대해 고민했다. 촬영 전날 큰 눈이 내렸다. 세상은 하얗고, 영하 10도였다. 능소화가 피는 여름을 기약하기로 했다.

 

새로 촬영 날을 정하고, 영화를 골랐다. 처음보다 쉬웠다. 혼자서 인연 깊다고 믿는 <혜화, 동>을 하기로 했다. 처음 쓴 독립영화 리뷰였고, 혜화를 연기했던 유다인 배우를 인터뷰했었다. 겨울이면 혜화의 표정을 생각한다. 북아현동에서 만나기로 약속 하고, 빨간 목도리와 안현미 시인의 <곰곰>을 챙겼다.

 

안현미의 시에서 아현동은 ‘거짓말을 제조’하는 곳이자, ‘별책 부록 같은 골목’에서 ‘습관적으로 희망하고 반복적으로 절망하는 날들’을 살아내는 곳이었다. 기대와 달랐다. 높은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절망할 틈이 없었다. 아직 부서져 있는 장소를 찾아 걸어 올라갔다. 밀린 안부를 전하고, 촬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위쪽에서부터 찍으면서 내려오기로 했다. 올라가는 길이 잔뜩 진흙이었다. 덕분에 먼저 올라가던 친구의 흰 신발이 흙빛으로 젖었다. 신발을 제물 삼았으니 반드시 원하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광막할 거 같았던 재개발 지역은 이미 조금 망가져 있었다.

 

혜화를 따라 하려니 자꾸 웃음이 났다. 웃으면 안 된다고 나는 지금 혜화가 된 거라고 아무리 다그쳐도 광대가 올라갔다. 간신히 광대를 부여잡으며 촬영을 시작했다. 한참 혜화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점퍼를 입은 두 남자가 뛰어왔다. 운동을 하는건가 생각했다. 힐끔 보고 다시 몰입하려고 했다. 숨을 몰아쉬며 두 남자가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냐고, 여기서 사진 찍으시면 안 된다고, 돌아가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지만 별 소용 없었다. 구시렁거리며 내려왔다. 이제 막 혜화가 되려던 참이었다고.

 

영화 속에 있던 파란 대문을 찾아 일대를 하염없이 걸었다. 막다른 골목을 마주치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귀가 빨개지고 나서야 파란 대문을 찾았다. 내면 연기가 필요했다. 어릴 때 키웠던 병아리를 생각했다. 찍고 나니 곳곳이 파란 대문이었다. 재개발 지역에서 멀어질수록 찍을 곳이 많지 않았다. 걷고 걸어 충정로로 내려왔다. 결국, 늦은 점심을 먹고 재촬영 걱정을 하며 인사를 나눴다. 다음에는 <혜화, 동>의 촬영지인 일산으로 가야 하나 싶어 고민스러웠다.

 

<혜화, 동> 리뷰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봄이 오는 것은 겨울이 끝나서가 아니다. 움트는 새싹과 새로움 다짐, 소소한 기대들이 모여 봄이 되는 것이다. 봄은 또 다른 실패를 기대하게 한다.” 오늘도 소소한 실패들이 있었다. 흰 신발, 쫓겨남과 어설픈 표정이 모여 사진을 기대하게 한다.

 

돌아오면서 내가 오늘 말을 많이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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