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공모전 [Re-wind}

김중현, <이월>

글 : 미래

생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인물이 세상에 어딨어’라는 다른 관객의 말을 들었다. 왜 없을까. ‘민경’이 처한 환경과 삶을 살아내는 방식, 감정은 정도의 차이일 뿐 나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가난, 청년, 여성, 보호자의 부재라는 다양한 소수자성의 총체인 민경에게 삶은 매 순간이 재난 상황이며 생존을 향한 투쟁이다. 민경이 살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악해 보이거나 밉지 않다.

생존에 대한 민경의 집착을 보면 ‘여진’을 향한 분노는 결코 질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노에 차 ‘그렇게 해서는 죽지 않는다’고 하는 민경의 대사는 자기 삶을 조롱당했다는 데서 기인한다. 넓은 집이 있고 또래 남성에게 사랑도 받을 수 있는 여진의 수많은 자살 시도는 민경에게는 투정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은 실패할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여진의 자살 시도는 삶이 힘들다는 시위이고, 그보다 고난도의 삶을 살아가는 민경에게는 ‘넌 어떻게 그렇게나 꿋꿋이 버티냐’는 조롱에 가깝다. 물론 여진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고 민경이 발 딛고 있는 지반이 좀 더 안정적이었다면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민경에게는 수많은 구김살이 생겨버렸다.

<이월>의 이야기는 분절적으로 전개된다. 컨테이너, 여진의 집, 진규의 집 등 각각의 공간은 각각의 이야기를 갖는다. 민경이 관계를 맺는 방식 또한 그렇다. 유대를 쌓아나가던 성훈을 눈썰매장에 두고 도망치며 한순간에 관계를 끊어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민경은 매 순간 관계의 유지보다 포기를 선택한다. 여진의 환대는 뿌리치고, 성훈과의 관계는 끝내 진규의 사고 이후 단절되어 버린다. 과연 민경의 즉흥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일까.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민경의 모습은 청년들의 관계 맺기를 드러낸다.

 

청년들의 정서에는 더 이상 매트리스가 없다. 최후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정감은 정서의 근원에서 매트리스처럼 작용한다. 돌아갈 데는 사람, 나를 지켜줄 경제력, 단단한 나 자신 등의 수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그런 곳이 현재의 청년들에게는 없다. 취업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차마 부모님께도 면목이 없어 돌아가지 못한다. 부모의 충분한 지지는 정서적 안정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자원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열패감과 경쟁에서 탈락했다는 박탈감은 가족조차 청년 세대의 매트리스가 되지 못하게 한다. 탈락자를 양산하는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그 어느 것도 충분한 완충재로 작용하지 못한다. 국가는 사회안전망을 다져서 매트리스를 만들어 두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실패를 해도 마음이 크게 다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도전을 한다. 안전망이 부재하다 싶은 대한민국에서 청년들의 마음에는 매트리스가 있어야 할 가장 깊은 자리에 분노와 혐오가 피어난다. 마치 민경의 구김살처럼.

‘청년들이 집단우울증에 빠졌다’라고 표현한 기사를 봤다. 취약계층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것은 당연하다. 청년 세대를 개념화하는 수많은 단어는 ‘무기력’으로 결집한다. 전쟁이나 민주화 등의 급격한 사회변화는 더 이상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계층은 공고해진다. 청년 문제의 핵심은 경제다. 돈이 없으니 비용이 발생하는 모든 일에 제동이 걸린다. 연애나 결혼부터 빠르게 포기한다. 취업해도 집을 마련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게 포기의 단계를 배워간다.

그렇다면 이 시대 청년들의 관계가 분절적인 것은 당연하다. 나를 책임지는 데에 온 힘을 다 쏟아 관계를 책임질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관계의 유지와 향상을 위해서는 관대함이나 포용력과 같은 힘이 필요하다. 소진되어버린 이들에게 관계에서의 노력과 실패, 이후 또 다른 관계에서의 실험은 힘에 부치는 과제다. 그렇게 우리는 순간마다 곁에 있어 주는 사람만을 만나고 관계가 틀어질 때 놓아주는 법을 익혔다. 애쓸 힘이 없는 이들이 자신을 지키는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마음을 주지 않거나 먼저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기대가 있으면 실망이 있다. 반대로 말해 마음을 적게 써야 상처를 덜 받는다. 우리의 관계 맺기는 다분히 위악적이다. 민경 역시 여진이나 진수와 함께일 때보다 다시금 돌아간 컨테이너를 더 편안해할 것이라는 예상은 억측일까.

그럼에도 민경은 컨테이너로 가지 않아야 한다. 컨테이너는 사람이 아닌 사물이 있을 공간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덜컹대다 날아오르는 컨테이너는 철거를 의미할 것이다. 철거되는 컨테이너에서 민경은 탈출할 수 있었을까? 아니, 탈출하려고는 했을까? 그 후 민경은 어떻게 되었을까. 민경의 삶은 영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져 간다. 여진의 집 앞 물웅덩이를 마주할 때 연상에서 그치던 죽음은 민경이 물에 빠지며 실체를 가지고, 진규가 교통사고를 내며 점점 가까워 온다. 민경은 여진에게 자살에 성공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컨테이너로 향한다. 가족에서 벗어난 개인들이 자신을 지킬 방법이 이제는 제시되어야 한다. 민경을 혼자이고 편안하기까지 한 컨테이너에서 구출해야 한다. 삶이 먹고 자며 생을 연장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면 민경은 언제나 삶과 죽음 사이의 그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돈도 없고 오갈 데도 없어 친구의 자취방에서 신세를 지던 때가 있었다. 당시 우린 우울이 극에 달해 있었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데 발생하는 비용은 절망적이었고 우리는 살아내기가 힘에 부쳤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우리의 대화는 누군가 죽고 싶다고 고백하고, 상대방이 그럼에도 살아보자고 설득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정서 통장에 잔고가 없을 때, 나를 설득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더 이상 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같이 살자며 상대를 설득하는 게 죽지 말자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보다 쉽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내가 나를 죽일까 두려웠다. 지금에서야 안다. 당시 우리의 주거공동체는 서로의 죽음을 막음으로써 자신을 살리려 했던 생존공동체였다. 친구는 경제력을 갖출 때까지 자신을 책임져 줄 스폰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는 우리의 스폰서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친구와 나는 사회안전망의 부재를 온몸으로 느끼며,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매일을 흔들리며 버티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 ‘그땐 그랬지’ 할 것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선 오늘은 살자고 약속하며 안정의 형태를 빚어간다. 민경에게도 살자고 함께 다짐할 친구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컨테이너 말고 자기 곁으로 오라고 해주는 친구를 만들 기회가 주어졌으면 잘 살 수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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