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읽기모임 : 필독

김의석, <죄 많은 소녀>

글 : 미래

몸으로 말해요

<죄 많은 소녀>를 관통하는 정서는 단연 자살이다. 이야기는 ‘경민’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영희’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영희가 경민의 죽음을 부추겼는지를 추적하는 듯하던 전개는 영희의 음독을 기점으로 전환된다. 입원해 있던 중 발견된 경민의 유서는 영희를 의심에서 해방한다. 교실로 돌아온 영희는 ‘여러분 앞에서 가장 멋지게 죽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영화는 복수극이 된다. 영희 중심의 이야기 구조와 몰아치는 강렬한 이미지들은 영화가 끝난 이후 경민의 죽음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경민이 왜 죽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남은 건 ‘원래 죽고 싶어 했다’는 영희의 모호한 답변뿐이다. 다만 경민의 자살 이유를 밝히는 데에 관심이 없는 건 관객만이 아니다. 영화 속 수많은 학생의 질문은 ‘왜’가 아닌 ‘누가’로 시작한다. 경민과 깊은 관계가 아니었던 학생들은 누가 경민의 죽음에 관여하였는지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며 지목을 옮겨 간다. 학생들의 반응을 토대로 하기보다는 경민에게 ‘왜’를 부여하여 영화 속 두 번의 자살을 따라가 보려 한다.

자살은 절대 충동적이지 않다. 영희와 마주쳤던 날의 경민을 추동한 힘은 무엇인지를 따져야 한다. 경민은 오랜만에 마주친 영희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다. 가깝지 않던 경민의 당황스러운 고백에 영희는 ‘증명할 수 있냐, 목숨도 걸 수 있냐’고 묻는다. 경민은 ‘한솔’에게도 영희에 대한 마음을 알리지만 한솔은 연적에게 ‘넌 죽지도 못한다’며 적대감, 혹은 감정의 우위를 표현한다. 경민의 마음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했다. 영희와 한솔에 따르면 사랑의 입증은 죽음으로 가능하다. 경민의 자살은 사랑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수행된다.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부재다. 경민은 한솔에게 두고 보면 알 거라 답했다. 경민은 진심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영희와 경민, 한솔의 의사전달에서 ‘보이기’는 ‘말하기’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본래 퀴어는 ‘이상’을 뜻하는 단어다. 세 명 사이에 오가는 감정보다 퀴어한 건 그들의 의사 표현 방식이다. 경민은 죽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보여’ 준다. 왜 경민의 발화는 말하기가 아닌 보이기인가. 변방의 존재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영희와의 관계에서 경민 또한 그런 존재다. 그래서 영희를 향한 경민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을 때 유용한 발화 방식은 요란을 떨어서 드러내는 것이다. 거리를 행진하며, 또는 크레인 위에서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는 대개 자기의 훼손을 동반한다. 신체가 그들의 몇 없는 쓸 만한 자본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태워 가며 말해야만 타자는 보이고 들린다. 결국 고통의 전시는 타자의 유의미한 말하기 전략으로 기능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타자를 이상해 보이도록 한다. 진심의 증명을 위해 죽은 경민이 그렇듯 타자는 대상을 넘어 이상한 존재, 퀴어로 치환된다.

영희 역시 보임으로써 말하는 화자다. 퇴원 후 교단에서 수화를 하는 영희에게 소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손짓으로만 전달하는 언어는 청자에게 닿지 않는다. 영희도 정확한 전달을 기대하지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했던 그간의 음성은 묵살되었다. 목소리가 삭제되고서야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주어진 영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소리 없는 독백뿐이다. 영희는 교실에서, 경민의 어머니 앞에서 자살을 예고했고 그들은 어떠한 준비도 할 수 없다. 경민의 죽음 앞에 영희 역시 그러했다. 영희가 역할은 증언이 아닌 자백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우울을 전염시킨다는 소문이 있는 영희는 밀폐된 계급사회인 교실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대상이다. 경찰 역시 영희와 경민이 입을 맞추는 장면이 담긴 CCTV를 보고는 영희를 몰아세운다. 영희는 주류사회에서 이상은 곧 죄임을 피부로 느꼈다. 목소리를 가진 이와 빼앗긴 이 사이의 불균형한 싸움에서 영희가 할 수 있는 공격은 그녀만의 이상한 방식일 수밖에 없다. 몸으로 말하는 야만의 언어는 강요당한 선택이다. 영희의 자살은 권력 집단인 교사와 경찰, 교실, 그리고 경민의 어머니를 향한 보복이자 그들이 포착하려 한 적 없는 자기 존재의 증명이다. 그들은 영희의 예고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경민의 죽음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답은 CCTV 화면 안에 있다. 그러나 CCTV에 녹화된 당일이 재연될 때, 영화 안의 소리는 삭제된다. 주류는 주변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그들의 대화는 어떻게 재현해도 무음이다. 무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영희가 경민의 죽음을 유도했다는 오역이 전부다. 영희와 경민은 동류다. 학교의 누구도 경민에 대해 ‘특이한 애였다’ 이외의 설명을 할 수 없는 반면, 영희는 경민이 죽고 싶은 이유를 듣고는 너무 이해가 되어 말릴 수 없었다고 한다. 동족의 우울을 온전히 포용한 결과는 잔혹하다.

영희와 경민의 마지막 모습은 같은 장소에서 등장한다. 굴다리는 지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공간이다. 주변인이 소멸해가는 과정은 보일 수조차 없다. 경민이 사라진 굴다리를 영희가 걷는다. 경민의 자리가 곧 영희의 자리다. 둘이 통하는 지점이 있었음을 알린 순간부터 어쩌면 영희의 끝은 예정되어 있었다. 영희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갔다. 또 다른 누군가가 영희를 죽였다고 지목될 것이다. 들리지 않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주변’을 탐색하듯이 듣는 이가 없을 때 교실에는 도돌이표가 찍힌다. 둔감은 보편의 인간이 저지르는 악이고, 형벌은 쌓이지 못하는 역사다. 지목은 끝나지 않는다.

© 2023 by Andy Deck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