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박석영 ​<스틸 플라워>

천혜윤
“몸(만)으로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에 대하여”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그런 날들은 하필 겨울이었고 밤이었으며 손 안의 휴대폰은 켜지지 않아서, 모르는 누군가의 호의 없이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열세 살의 서울대공원과 스물 세 살의 어느 겨울. 열세 살엔 누군가 검은 눈을 하고 자신의 차에 오르라며 설득했고, 스물세 살엔 아무도 선뜻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밤의 거리란 가야 할 곳을 잃은 자를 내켜하지 않는 곳이었다. 거리를 걷는 자는 마땅히 어딘가에 이르러야만 했다. 밤은 우리가 어둠 속을 제멋대로 헤매기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배낭 하나에 제 집처럼 밤길을 드나드는 소녀의 영화란 내게 공포에 가까운 장르다. 건물의 구조와 인물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어둠 탓에 그 형태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몇 장면들 속에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런 탓이다. <스틸 플라워>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잃어버릴 길조차 갖지 못한 소녀를 조망하며 우리 모두가 지닌 원초적인 두려움을 건드리는 위험하고 매혹적인 우화다.

 

 여기에서 ‘우화’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감독의 전작인 <들꽃(Wild Flowers)>의 연작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두 작품 모두에서 제목으로 차용되는 소녀와 꽃의 이미지는, 아직 스스로를 방어할 줄 모르는 연약한 존재가 그 연약함만으로 세상과 어떻게 대치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소녀들은 여전히 길과 집을 잃었고, 그 중에서도 감독은 구태여 ‘하담’을 다시 한 번 메인 캐릭터로 앞세워 그녀만의 내러티브를 새로이 구축한다.

 

 그러나 이 두 영화의 제목은 각자 엄연히 다른 함의를 띠고 있다. ‘들꽃’은 우리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면서 언제나 복수형을 이룬 채 다발로 존재한다. 모텔에 강제로 팔려간 세 명의 가출소녀들을 다룬 <들꽃> 역시 저녁 뉴스에서 혹은 여느 괴담들 사이에서 이미 우리의 입과 귀를 건너왔음직한 익숙한 이야기다.

 

 다분히 현실 고발적 성격을 가진 전작에 비해 <스틸 플라워>는 강한 상징성을 기반으로 한 우화에 가깝다. 나는 당연하게도 제목의 ‘steel(철)’을 ‘still(여전한)’으로 해석 했었다. 철로 만들어진 꽃이, 세상천지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일까 의아히 여기며. 그러나 원제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작품의 화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녀 하담은 언제나 ‘하나’다. 유일하다. 들꽃처럼 다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어딘가에 외로이 서성이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우리는 하담이라는 비현실을 통해 현실을 반추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애초부터 비현실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담은 어디에서 왔는가. 어째서 외우고 있는 전화 번호 하나 없이 밤거리를 전전하는가. 경찰, 내지는 사회에 손을 뻗지 않고 되레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등의 일련의 물음들은 이 영화에서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무엇’과 ‘왜’가 배제된 ‘어떻게’를 동력으로 하담은 한 걸음씩 전진한다. 한 마디로 소녀에겐 역사가 없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게 된 갓난아이처럼 하담은 ‘그냥’ 이 밤거리에 내던져져 있다. 하담은 성인의 세계에 함부로 출입한 어린 아이같이 기이한 형태로 그곳을 떠돈다. 그리고 역사가 없는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쓰임은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것, 걸을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사실 뿐이다.

 

 사실상 <스틸 플라워>의 내러티브는 이 소녀가 먹고, 씻고, 잠들기 위해 그 유일한 자산인 몸을 소비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제로 자신의 육체를 착취당해야 했던 <들꽃>의 소녀들과 다르게, 하담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정당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사용하고자 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란 본래 바다의 것이었던 물고기들을 밀어 넣은 저 횟집의 수조 같아서, 비상 연락망 하나 없는 소녀는 이 각진 시스템 안으로 좀처럼 편입되지 못한다. 이 때 하담이 손을 겨누는 곳은 (다행스럽게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시스템의 부조리성이다.

 

 아르바이트의 대가를 받지 못한 하담이, 횟집 수조에 갇힌 물고기들을 하나씩 꺼내 바다로 던지는 장면이 주는 감응은 여기에서 온다. 그러나 <스틸 플라워>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거나 전복적인 화두를 던지는 작품은 아니다. 일례로 물고기를 던지는 장면 그 다음 컷은 바다 위에 뜬 고기잡이배와 하담이 마주보는 컷이다. 바다에 던져진 물고기들은 다시 횟집의 수조에 갇힐 것이고 ‘몸’만 가진 소녀가 이 거대한 사회와 그 시스템에서 안전할 리 없다. 영화는 여기서 사회가 아니라 소녀의 숨소리, 눈빛, 걸음걸이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기로 선택한다. 시스템 밖에서도 소녀가 인간다울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므로 하담은 탭댄스를 춘다. 탭댄스와 다른 춤의 차이점은 이것이 소리를 낸다는 지점에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소리의 기능이다. 하담이 숨을 쉬고 걸음을 걷고 얼마 되지 않는 말소리를 내는 것이 화면이나 인물의 전환보다 훨씬 드물기 때문이다.

 

 하담은 영화 안에서 타인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고, 그러므로 그녀가 내는 말소리들은 동물의 의사표현과 비슷하게 마치 퇴화된 것처럼 보인다. 예로 하담은 횟집 사장의 애인에게 맞을 때 제대로 된 자기변명 하나 하지 못한다.

 

 여기서 말소리의 대안은 몸의 소리다. 탭댄스는 하담이 자신의 육체만을 가지고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표현이 된다. 그토록 서늘하던 밤의 거리도, 발목을 흔들며 영롱한 소리를 내는 하담의 춤에 천천히 그 어둠을 벗는 듯 보인다. 다니는 자동차 하나 없는 이 영화 속의 밤, 그리고 거리가 두렵지 않게 느껴지는 최초의 순간, 하담은 그렇게 그 길 위의 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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