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공모전 [Re-wind}

박주환, <졸업>

글 : 이준수

상지대만으로는 너무 큰 싸움이었습니다

 

『마음의 사회학』의 저자 김홍중은 1997년 IMF 체제 이후 ‘진정성’ 퇴조를 말한다. 진정성의 시대란 자신의 욕망과 정치적 입장 등이 일치할 수 있었던 시대다. '진정으로' 이상을 위해 투신할 수 있던 시절이다. 단적인 예로 전태일의 분신이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영원한 노동자 인권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 사정이 나빠지고, 사회는 변했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생존’이 부끄럽지 않은 사회다. 구차하고 비겁하더라도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체면도 없냐는 말에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말할 수 있다. "당장 입에 풀칠도 못 하겠는데 그까짓 게 대수야?" 그러나 정말 '풀칠'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소시민, 특히 청년들의 마음속에는 취업률의 감소 등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싹트고, 그들은 ‘n포 세대’로 대표되는, 많은 것을 타협하는 세대가 됐다. 그들은 사회적 생존을 위해, 개인의 생존을 위해 개인을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하는 사회에 진입했다.

‘졸업’은 무섭다.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으니 책임질 것도 없다는 생각을 낳는다. 반드시 개인의 파렴치 때문만은 아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도태되는 시대다. 특히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 세대일수록 더 하다. 흔히 ‘20대의 시간은 이후의 시간보다 귀중하다’는 격언 아닌 격언 역시 젊은 세대의 비참함을 드러낸다. 이 시대에 대학 시절을 개인의 ‘커리어 쌓기’와 무관한 일로 소모하는 것은 큰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 누가 감히 그 역할을 맡을까. 안 그래도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 아닌가. 따라서 '졸업'은 목표이자 구원이다. 탈출구면서 도피처다. 개인에게 공동체 의식이 싹틀 리가 없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공동체라는 말은 구닥다리 같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압제처럼 여겨지기까지 하지 않나.

2010년 상지대에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김문기의 복귀를 결정했고, 2014년에는 ‘계획대로’ 김문기가 총장에 부임했다. 총장의 복귀가 결정된 이후인 2012년, 학생회장이 그것에 대해 질문하자 박근혜 당시 후보가 말했다. "어쨌든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고 인식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식으로 위원회도 잘 조정해주길 바랍니다." 현실적인 해결책이나 약속은 전혀 없었다. 그저 당사자들이 알아서 잘 풀고, ‘인식’을 달리하라는 어이없는 말뿐. 정치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에서, 정치인의 힘을 기대하는 약자들의 시선을 통해 내가 발견한 정치인은 구원자라기보다 방관자였다. ‘우리’에겐 절박했던 투쟁들이 장차 국가 수장이 될 자에게 얼마나 '적당한' 정치적 이슈로 취급되는지 아는 순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지대 총학생회는 징역 선고까지 받고 물러났던 사학 비리의 핵 김문기를 비롯한 ‘구재단’의 복귀 시도에 맞서 삭발, 단식 투쟁을 감행한다. 십여 년의 길고도 긴 싸움이었다. 일부는 소송에서 벌금을 선고받기도 했다. 뺨을 맞거나 도로에 주저앉은 채 끌려가거나 계단에서 떠밀려 정신을 잃는 수모도 겪었다. 이승현 등은 그들이 믿는 올바른 트랙을 지키기 위해 젊은 시간, 정력, 감정들 모두를 바쳤다. 병든 어머니의 간호를 못 해 가슴에 묻은 김승용을 비롯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각오까지 한 전종완 등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모든 것을 시도한 다음 이들이 꺼내든 수업 거부 역시 중단됐다. 수업 거부가 6주 차에 접어들자 누군가 말했다. “수업 거부가 길어지면서 '일반 학생들'에게까지 피해가 가고 있다.”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불안했을 것이다. 어떤 정의로운 자도 정의감만 믿고, 미래를 걸고 투신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이런 시대에서 〈졸업〉의 인물들이 보여준 용기와 신념은 박수받아야 할 것이다. 이승현이 학교를 떠나며 말했다. “취업을 하더라도 다시 원주에 돌아오겠다.” ‘졸업’을 했으니 더 이상의 투쟁은 나와 무관하다는 무책임은 거기에 없었다. 이 청년(들)은 기이한 열정과 신념을 갖고 있다. 박주환 감독은 그의 말과 행동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고 밝혔다. 그들은 말한다. 후배들이 다니기 좋은 학교를 위해서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진정성이 희소해진 이 시대에,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끈질기게, ‘진정성’ 있게 만들었나? 불가사의한 기분으로 되풀이해서 자문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것은 대학을 그저 거쳐 가는 물리적인 '장소'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으로 여기는 마음에 있다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젊은이들의 진정성을 나는 그곳에서 발견했다.

〈졸업〉은 상지대학교라는 특정한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리고 다큐멘터리(documentary)의 형식이지만 결코 한정된 장소의 ‘사실’이라는 측면에 한정되지 않는다. 요컨대, '학생들의 사학 비리 척결을 위한 투쟁'이라는 서사를 넘어서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이고, 공동체의 위기가 닥쳤을 때 소시민적 개인은 어떤 식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혹은 그러지 않거나) 고민하게 만든다. 내가 상지대의 투쟁에서 작년 우리 학교의 투쟁을 상기했던 것처럼 영화는 다큐멘터리면서도 영화적이고 문학적인 메타포 역시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개개인이 저마다의 욕망을 억눌러야 하며 가진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도덕과 윤리의 갈등이다. 누구도 마음으로는 사학 비리를 긍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백한 불의고 마땅히 처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평범한' 학생들은 그저 조용히 참고 사회에 나가서 하루 먹고 살며 조용히 살아가기만을 바랄 수도 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누군가의 말을 우리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저 내가 유대인이 아니고,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아니라고 해서 침묵한다면, 나중에 정말 그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그들을 구원해줄 이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사실, 우리 학교 역시 사학 비리가 벌어진 적 있다. 총장은 ‘다시’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지금도 그는 버젓이 학교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나중에야 알았다. 시위는 과거에도 있었고 그때도 총장은 사퇴를 약속했었다는 것을. 절망과 수모는 끝나지 않았다.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아 국가장학금과 신입생 입학 정원 및 학사정원감축 명령을 받아야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불만이 터졌다. 우리가 왜 피해를 봐야 하냐는 아주 솔직한 분노에서부터 이럴 거면 차라리 시위는 하지 말 걸, 이라는 후회 섞인 한탄까지. 무력했다.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박주환 감독의 〈졸업〉에서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졸업〉은 메시지로 가득한 영화다. 그러나 단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전혀 상지대와 무관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고 또 끓어오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연출 같은 단순한 구성상의 전략이나 배우들의 연기력에 의한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영화가 담고 있는 올곧은 진실의 힘 때문이리라.

어째 축사 같은 꼴이지만, 그들의 용기와 인내가 만들어낸 성과는 장차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밑거름이 될 것이며,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 개인의 삶에도 권력과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기억과 정신적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영화제에서 좋은 성과가 있었던 것이 나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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