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먹고 마신 것들

김초희​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차한비
콩나물을 다듬다가 속마음이 하나둘

찬실(강말금)은 가진 게 별로 없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이 나이만 먹어서 어느새 마흔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평생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만들며 살 줄 알았다. 함께 일하던 지 감독이 술자리에서 돌연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전까지는 일 잘하는 프로듀서로 평가받으며 한국영화의 보배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제 이찬실 PD를 찾는 현장은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사람들은 찬실을 탓한다. “피디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에서 “주구장창 지 감독하고만 일”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순식간에 백수 신세에 놓인 찬실에게 현실은 버거운 무게로 덮쳐든다. 동료의 부재를 소화하기도 힘든 시간에 빈곤한 생계를 감당해야 하고,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려운 질문이 쏟아진다. 그럼 나는 뭐였지? 내가 해온 일은 뭐였지?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예고 없이 찾아온 불행은 삶에 관해 묻는다. “와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찬실이 탄식해봤자 명쾌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다만 일이 없어도 할 일은 태산이고, 영화야 어찌 되었든 간에 여전히 동료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곁에 남아 있다. 찬실을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본다.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돈을 벌고,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치는 영화 감독 김영(배유람)을 만나 잠시 설레기도 한다. 하지만 찬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돈도 연애도 아니라, 그동안 미뤄두고 모른 척했던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때마침 등장한 유령 장국영(김영민)은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찬실은 산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에 관해 “깊이깊이”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답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연출 김초희, 2019)에서 좋아하는 장면을 하나 꼽아야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콩나물 신을 선택할 거다. 찬실이 세 들어 사는 주인집 할머니(윤여정)와 마주 앉아서 콩나물을 다듬는 장면이다. 콩나물이든 시금치든 달래든 다듬는 방법이야 비슷하다. 흐르는 물에 헹구고, 불필요한 이물질을 걸러내고, 짓무르거나 시들어서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벗겨주면 된다. 말이야 쉽지만 하다 보면 금세 목과 어깨가 뻐근해져 온다. 일이천 원을 주고 산 콩나물 한 봉지가 더없이 크게 느껴지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이 귀찮아지기도 한다. 그때 말 상대가 옆에 있다면 이 고된 작업은 한결 수월해진다. 뭔가를 장황하게 또는 많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다듬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고요하다. 손으로 집어내고 매만지는 행위에 더해지는 대화란, 움직임만큼이나 소박한 리듬을 지니기 마련이다.

찬실과 할머니는 콩나물 한 바구니를 가운데에 놓고 앉는다. 조용한 거실에서 콩나물 꼬랑지를 뜯다가 할머니가 묻는다. “하던 일은 왜 안 됐어?” 한집에 사는 사이이니 그간 물어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할머니는 이전까지 찬실에게 뭐가 어렵고 왜 힘든지 말해 보라고 채근한 적이 없다. 어쩌면 찬실의 말대로 할머니들은 “사는 게 뭔지 다 아는” 걸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콩나물을 다듬는 시간이 말을 건네기에 적당해서인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찬실은 콩나물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너무 무겁지 않게 할머니는 마음을 묻고, 너무 가볍지 않게 찬실은 마음을 털어놓는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눈빛이 지닌 온도를 알아챌 만큼만 되는 거리에서 둘은 속에 자리 잡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늙어서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어 좋다는 할머니에게, 찬실은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대꾸한다. 할머니는 웃음기를 머금고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라고 답한다. 매끈하게 쌓여가는 콩나물은 그날 둘이 이뤄낸 무엇이다. 오직 두 사람의 손으로 시작해서 둘이 함께 맺은 일이다.

콩나물은 만만할 정도로 평범한 식재료다. 값싸고 흔해서 누구나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데다가, 어떻게 요리하든 그럴싸한 음식이 된다. 반찬을 만들기 귀찮을 때는 콩나물밥을 지어 간장에 쓱 비벼먹고, 숙취로 고생하는 날에는 시원하게 끓인 콩나물국만큼 요긴한 것도 없다. 하지만 콩나물을 다듬어 본 사람이라면 지갑을 열기 전에 한 번쯤 고민한다. 콩나물무침처럼 시시해 보이는 반찬조차 이토록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알고 나면, 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뚝딱 완성되는 건 없다. 음식도 영화도 인생도, 애쓰면서 조금씩 모양을 갖춰나간다. 이제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진 찬실은 시나리오를 쓴다. 일단 아주 재미없는 시나리오부터 시작한다.

[레시피] 콩나물을 다듬다가 속마음이 하나 둘

1. 머리와 줄기가 오동통하고 검은 반점이 없는 콩나물을 고른다.

2. 흐르는 물에 잘 씻는다.

3. 속마음이 궁금한 사람을 데려온다.

4. 마주 앉아서 콩 껍질을 떼고 꼬리를 다듬는다.

5. 뭔가 이야기가 시작될 거다.

6. 말문이 막힐 때는 장국영의 주문을 들려주자. “땡땡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땡땡 씨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좀만 더 힘을 내 봐요. 잘 다듬어 봐요.” (마지막 문장만 살짝 바꿨다)

7. 데쳐서 무치든, 끓이든, 볶거나 조리든 원하는 대로 먹자. 콩나물과 콩나물을 다듬은 우리 모두를 기특해하면서 맛있게, 배부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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