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장률 ​<춘몽>

천혜윤
“천국보다 낯선, 이 삶”

 나는 내 모든 순간들이 무수한 의미들로 가득하길 바랐다. 의미 속에서 헤엄치고 싶었다. 살아간다는 건, 의미가 주는 명암들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고 또 뱉어내는 일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인생을 꿈처럼 어딘가에 흘려보냈을 뿐이다.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의 대부분은 꿈속에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터널 너머로, 꿈의 세계로, 모든 것이 좀 더 분명하고 또 격정적인 곳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 속에 사로잡혀 이따금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성탄절도 아닌데 매일 선물같이 놓여있는 이 아침들은 왜 이렇게 낯설까. 아직 단꿈에 젖어 그런가. 그렇다면, 어서 침대 한 귀퉁이에 꿈이 쉬어갈 자리를 내주고 이만 도망치고 싶어진다. 이렇게 부끄러운 생각 속에 빠져있는 와중에 문득 장률 감독의 꿈과 만났다.

 

 봄의 꿈, ‘춘몽’은 덧없는 인생을 이르는 말이다. 덧없음이란 무어냐고 어린왕자가 어느 별의 학자에게 몇 번을 물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 때 학자는 어린 왕자에게, 덧없음이란 ‘머지않아 사라질 위험에 처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감독 장률에게 삶이란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일이기라도 한 걸까. <경주>를 비롯한 그의 작품에선 죽음의 냄새가 난다. 헌데 그 죽음이란 애도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삶이란 그에게 천국보다 낯선 무엇이기 때문이다.

 

 <경주>의 인물들은 죽음 안에 현혹된 존재들처럼 보인다. 장례식장, 무덤, 자살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경주라는 공간에서 장률은 삶 뒤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앞의 삶을 그린다. 살아가는 일은 죽어가는 일과 맞닿아있다는 당연한 전제가 장률의 손을 거쳐 무척이나 돌출된 형태로 이야기 곳곳에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고 있는(잊어야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죽음이라는 완결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드라마(drama)임을 선연히 드러낸다. 이 드라마틱한 완결 앞에서 삶은 때때로 무기력하다. 그래서 <춘몽>은 낮잠처럼 무기력하고 낮술처럼 시시껄렁하다. 발목에 기다란 뱀이 스치듯 죽음의 그림자는 인물들을 감싼다. 전작 <경주>가 죽음을 인물의 근처에 두는 데 그쳤다면 <춘몽>에서는 기어코 집어 삼키는데 이른다. 그런데 이 죽음은 슬퍼하기가 어렵다. 주인공 ‘예리’는 우리가 갈망하면서 동시에 갈망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저 반대편의 세계로 잠시 사라졌을 뿐이라고 믿게 된다. 슬퍼하는 것은, 슬퍼질 것은 남겨진 예리의 세 남자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마냥 친구라 부르기에도 묘한 세 남자는 예리가 죽은 후에도 끝끝내 이곳에 남아 제 몫의 생을 보낸다. 그 남겨진 모양새가 어쩐지 처연하다.

 

 <춘몽>에서 짐 자무쉬 감독의 흑백영화 <천국보다 낯선(1984)>를 연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영화관에서의 장면은 오마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조선족 여자 예리와 탈북자 ‘정범’, 시종 껄렁껄렁한 ‘익준’과 멍청한 ‘종빈’은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쉽게 지워질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우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미국이라는 'new world'가 인물들에 ‘paradise’가 되지 못하듯, 예리와 정범에게 한국(남한)이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 타향이다.

 

 예리의 뒤를 쫓는 세 남자의 일상이 시간차 없이 나열되는 데서는 <천국보다 낯선>의 병렬적 내러티브를 유추하게 된다. 무엇보다 <천국보다 낯선>의 여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춘몽>의 예리 역시 남자들 사이를 ‘영영’ 떠난다. 터널 끝으로, 죽음으로 떠난다. 그녀는 시종일관 세 남자의 빛이자 햇볕이었으나 자신의 삶은 내내 흑백이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선량하기까지한, 예리의 시야는 흑백으로 얼룩져있다.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를 두고 ‘오래 살 거야’ 라고 말하는 점쟁이 앞에서 그녀는 선뜻 기쁠 수가 없다. 예리는 정범, 종빈, 익준과 섹스하는 꿈은 꾸지만, 그리고 자신을 원한다면 가슴 정도 내어줄 수도 있지만 사실은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남자와 사랑하고 싶다.

 

 내게 <춘몽>은 오직 단 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술에 취한 예리가 겁에 질린 얼굴로 전봇대 위를 오르는 모습, 이 때 예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전봇대의 높이가 아니라 전봇대 아래로 다시 내려가 불분명한 일상 속에 뒤엉키는 일이다. 예리가 익준에게 건네던 말, “우리 그냥 이대로 살아요” 하는 말 속에 갇히는 일이다.

 

 세 남자는 예리의 꿈을 꾸지만, 예리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꿈을 꾼다. 그녀가 죽고 난 후에 화면은 처음으로 흑백의 어둠을 거두고 본연의 색감으로 돌아온다. 생을 바라보는 예리의 흑백의 시선이, 죽음으로서 걷어졌기 때문에. 꿈인지 죽음인지 현실인지 모를 터널 저편으로, 예리의 쓸쓸한 춘몽(春夢)은 그렇게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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