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短編’的)
남궁선 <세상의 끝>
이채현
씩씩한 슬픔

 나는 세상의 종말을 앞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들을 자주 꺼내보며 예견된 종말을 꿈꿨다. 끝을 부여받은 그들은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전하고, 미루어두었던 일들을 한다. 세상이 유한해지자, 내일이 불필요해지자, 사람들은 좀 더 용감해진다. 겁쟁이인 나는 사람들이 용감해지는 걸 보는 게 좋았다. 그런 종말의 낭만성을 사랑했다.

 

 그러나 세계의 멸망을 앞둔 이 소년의 눈에는 어떠한 기대도 절망도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을 죽이거나 종말을 떠드는 방송을 멍하게 쳐다볼 뿐이다. 세상이 끝난다고 해서 당장 오늘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멸망을 믿지 않는다는 청년들이 찾아왔을 때도, ‘불길하다’며 텔레비전을 집어 던지는 청년을 볼 때도, 그들을 따라 멸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이는 부산으로 향할 때도 소년의 눈길은 서늘하다.

 

 청년들은 끊임없이 지구는 멸망하지 않을 거라고 외친다. 종말은 바보 같은 소리라며 웃는다. 그러나 과장된 웃음소리는 그렇게라도 믿어야 종말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들린다. 하트모양 네온사인이 깜빡거리고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자동차가 종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젊음을 태우고 달린다. 깜빡 잠이 든 청년의 종말 알람이 지구멸망까지 고작 1분 남았음을 알리고 있다. 잠에서 깬 건 소년뿐이다. 소년은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세상의 끝과 마주한다.

 

 태아의 형상을 한 인형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 전 세계인들의 종말은 어쩐지 축제 같은데, 소년의 고요한 종말은 영영 다른 세상 같다. 무던해 보이는 소년의 자세가 종말은 없다고 단언하거나 외면하며 웃는 청년들의 것보다 흔들리는 이유는 ‘희망 없음’을 ‘희망없이’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절망적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답은 우주멸망뿐이라는 차가운 농담을 주고 받아야 하는 요즘의 ‘미친 세상’에서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이 되곤 한다. 그것은 내가 종종 꿈꿨던 종말의 낭만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소년의 무기력한 눈동자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소년이 지구멸망에 정말 무감각했다면, 아무리 동생이 원해서라 하더라도 청년들을 따라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혼자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청년의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 “마지막엔 울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하자”는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의 마지막 눈을 생각한다. 슬픔만이 진정으로 씩씩한 것을 만든다는 이 아이러니가 슬프다고 말했던 한 평론가의 말을 생각한다.*

 

 확실한 것은 세상이 멸망을 향해 가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말을 하고, 발걸음을 내디디고 함께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거대한 종말 앞에 무력하게 느껴질 수록 더욱 발버둥을 치자. 먹구름 앞에서 우린 종종 더 강해지고, 슬픔으로 점철된 손을 잡은 우리는 더욱 씩씩해진다. 종말을 마주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겠지만 우린 최소한 걸어야 하는, 걷고 싶은 걸음을 걷자. 너무 늦어버리지 않게. 그래서 나는 달려가 소년의 그 ‘희망 없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싶다. 소년이 분명 종말 앞에서 좌절하고 슬퍼했기를 바란다. 나는 그 씩씩한 슬픔을 믿는다. 그러한 살아있는 감각들이 멸망해가는 미친 세상에서 우리가 ‘스스로’ 종말을 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소년은 두 눈을 뜨고 세상의 끝을 보기로 선택했다. 그러니까 우리도 지금 이 미친 세상이 주는 무거운 감각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손을 잡고 걷자. 종말을 스스로 택해선 안 된다.

 

*황현산

 


단편영화yoUeFO <세상의 끝> (http://youefo.com/film/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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