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읽기모임 : 필독

김태용, <거인>

글 : 김지수

나는 영재를 안다

나는 영재를 안다. 영재의 구겨진 교복과 짜증 섞인 한숨과 누구보다 빠른 눈치를 안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 집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걱정이 될 정도로 비가 퍼붓던 여름밤, 학교 옆 공원의 커다란 천막 밑에서 친구들과 비를 피하고 있을 때 영재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저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열여덟 살의 마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사연들이 하나 두울 새어 나와 곧 폭우 속으로 흩어졌다. 누가 처음 말문을 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누가 누가 있었는지도 이제 선명하지 않다. 그때 내 눈에 담겼던 풍경의 일부만 드문드문 떠오를 뿐이다. 새까만 밤거리.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던 공원. 천막을 찢을 것처럼 쏟아지던 빗줄기.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 그 틈바구니에 꼭 영재가 끼어 있었던 것만 같다. 열일곱 영재는 열여덟 나에게 말끝마다 누나 소리를 붙여가며 아주 싹싹하게도 굴었고, 나는 그런 영재가 웃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디 먼 곳으로 훌쩍 이사를 간 탓에 소식이 끊겼다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고. 자꾸만 이런 착각에 빠진다.

그런데 그렇게 싹싹하고 예의 바르기만 한 애는 아니다. 영재는 시설에 들어온 후원 물품을 훔쳐다가 여기저기 팔아넘기며 돈을 마련한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면 언제든지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배신한다. 살아남아야 하므로. 조금만 덜 비열해졌다가는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위협받으므로. 그래서 영재의 치졸한 도둑질과 속임수가 괜히 서글퍼 보이는 순간이 많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영재가 반성하지 않기를 바랐다. 영재의 삶에는 아무런 조력자도 없고, 그 치졸함이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영재의 삶은 단순히 조력자가 없는 수준이 아니다. 영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방해물이다. 아빠는 일할 생각이 없다. 영재를 시설에 보낸 것으로도 모자라 동생 민재까지 보내고 싶어 안달이다. 몸이 안 좋아 시골에 내려가 지내고 있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영재에게, 민재도 그 시설로 데려가면 안 되겠냐고 기어이 묻는다. 영재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대답한다. 엄마도 진짜 못났다. 왜 어른들이 돼서 책임들을 안 지려고 그래, 다들? 내가 민재 데리고 간다고 쳐. 우리 둘 다 들어가면, 엄마 아빠 금방 좋다고 갈라질 거 아냐. 그럼 우리 어디로 돌아가? 나 누가 책임져? 민재는 내가 책임져? 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데?

죄를 지은 건 영재가 아니라 부모다. 별 뜻 없이 부모가 되어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분명 잘못이고 중죄이다. 일단 낳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고 그냥 낳아버리는 사람들. 돈도 없고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데 아이는 절대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돈도 없고 생각도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일은 정말로 고통스럽다. 영재는 어리광부릴 틈새도 없이 순식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 던져져 허우적거리며 커왔다. 행복한 유년 시절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열일곱 영재가 가진 거라곤 구겨진 교복과 짜증 섞인 한숨과 누구보다 빠른 눈치가 전부고, 이 세상에 영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영재뿐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재에게 구원은 없다. 밀양에 있는 야곱의 집으로 떠나는 날, 시설의 원장은 영재에게 말한다. 어딜 가든지 네가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만 버리고 살아. 너보다 불쌍한 사람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넌 그 생각만 버리면 잘 버틸 수 있을 거야. 이야기를 듣는 영재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언젠가 그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웃음이 일었으면 좋겠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아주 느리게라도 모든 게 나아지기를 바란다. 시설 사람들한테 말하던 대로 신부가 되어도 좋고,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영재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되었으면. 원하는 것이 없다면 찾게 될 때까지 편하게 방황할 수 있었으면.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제 손으로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냐는, 영재의 물음 아닌 물음이 계속 떠올라 마음이 헛헛하다. 물음보다는 분노, 분노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던 말.
 

이런 말들을 그해 여름밤에 꼭 전해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한 명씩 돌아가며 마음 깊은 곳에 가둬둔 사연을 기꺼이 펼쳐놓던 밤에. 분명 그날 영재를 보았다. 영재는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둥그런 원 어딘가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영재를 안다. 영재를 알지만, 영재가 걱정 없이 웃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알지 못하고, 그 얼굴이 퍽 궁금해 속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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