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歌
"달리는 소녀"
신준 <용순>
옥상달빛 <달리기>
유성현

‘첫사랑에 빠진 여학생’. 이 한 마디로 용순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혹시라도 누군가 가지고 있을 첫사랑 혹은 여학생에 대한 환상, 이미지를 용순은 보란 듯이 발로 차버린다고나 할까. 포스터와 줄거리를 통해 예상했던 내용과 달라 당황한 내 감상이 꼭 그랬다. 전에 본 적 없는 첫사랑 소녀의 아찔한 돌발 행동들은 소위 말하는 사랑스러운 ‘심장 폭행’이라기보다는 마냥 위협적인 폭행처럼 거칠고 난폭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용순이 보여주는 씩씩한 미소와 솔직한 눈물에 또 미워할 수만은 없어서, 갈팡질팡한 심정.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그럼에도 이 ‘달리기’, 정식 음원 없이도 많은 사랑을 받은 2012년 제이래빗의 커버나 2002년 S.E.S. 5집에 수록된 리메이크 등의 여러 버전 중에서도 2015년에 공개된 옥상달빛의 커버곡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유는 아마도, 담담히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옥상달빛의 감성이 영화 속 꾸밈없는 용순과 더없이 어울렸기 때문에. 참고로 원곡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6년 윤상과 故신해철이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노 댄스No dance' 앨범의 수록곡이니, 정말 오랜 시간 사랑받고 있는 달리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듣는 노래의 제목이 아닌 이상 현실 속 달리기는 지겹고, 힘들고, 숨이 턱까지 차는 탓에 아무래도 그 자체로 사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랑하기 어렵기로는 용순의 달리기도 마찬가지. 체육 교사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걸 안 후에도 고개 들고 뛰라는 말에 일부러 더 고개를 숙이는 작은 반항이 전부고, 어차피 시작해 버린 탓에 그만둘 수도 없는 그녀의 달리기는, 한여름 운동장에 내리쬐는 뙤약볕처럼 ‘적당히’를 모르고 뜨거운 첫사랑의 매달리기이기도 하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설 순 없으니

 

이런 용순의 ‘매달리기’는 공교롭게도 노래 '달리기'와 전혀 무관한 것만도 아니다. 따뜻한 응원과 격려의 노래로만 들리는 이 노래의 숨은 의미가 실은 '(목)매달리기'라는 으스스한 루머가 돌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에 '죽음의 뉘앙스가 있는 점은 맞지만 자살은 절대 아니다'라는 작사가의 해명은 노래를 둘러 싼 괴담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긴가민가한 노래의 어두운 면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노래에서 은근히 다루던 죽음이란 생명이 없어지는 특정한 상태를 의미하기보다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끝과 마지막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기는 해도.

 

이러한 달리기의 (숨겨진) 감상을 좇는다면 첫사랑의 설렘, 소녀의 풋풋함 아래 가려진 <용순>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봄직하다. 미처 매달릴 새도 없이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가족을 떠난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만 봤을, 심지어 그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저 서있을 수밖에 없었을 어린 용순의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무거운 그림자의 정체. 기어이 끝까지 가보고자 했던 소녀의 집요한 첫사랑의 달리기. 가장 사랑이 필요할 시기에 가장 사랑을 공유할 상대의 상실에 두 번이나 깊게 파여 버린 소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토록 필사적으로 첫사랑에 매달리는 모습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 않을까.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나게 억울하겠죠

1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 걸

 

하지만 진짜 달리기의 시작은 어쩌면 그것보다도 훨씬 거슬러 올라가, 그녀가 갑자기 맞닥뜨렸던 엄마와의 이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붙잡았다면’으로 시작하는 후회와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미련이 뒤섞인 감정이 소녀의 마음 깊숙이 죄의식으로 매달려있지는 않았나. 하물며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를 달리기를 혼자 하는 소녀가 오롯이 느꼈을 외로움을 상상해보면 도리어 그동안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용순이 대견한 일이다.

 

결국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소녀의 드러나는 행동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상처였다.  다만 용순은 스스로 혼자라고 생각했던 탓에 과정과 방법이 서툴 수밖에 없었을 뿐. 다행히 달리기를 완주할 무렵의 용순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 사실을 그녀 자신이 알고 있는 듯 보여 안심이 되었다. 바라건대 “처음으로 끝까지 매달렸다.”고 말하는 소녀의 다음 달리기가 부디 쓸쓸하지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다시 달릴 그날까지, 소녀가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쉬기를. 어느덧 선선해진 가을바람이, 떳떳하게 땀 흘린 사랑의 주자走者의 나른한 휴식을 감싸주기를.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옥상달빛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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