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홍상수 ​<옥희의 영화>

천혜윤
“홍상수의 겨울”

 영화란 인위를 거친 후에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매체라지만, 영화과 교수이자 감독인 ‘진구’의 소망은 결국 여기,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의 무엇을 영화 속에 온전히 담아내는 일이다. 그는 감히 해석되지 않는 영화를 꿈꾼다. 이상한 우연들이 반복되는, 인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이 세계를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영화라고 믿는다.

 

 ‘왜곡 없는’ 영화를 그리는 진구의 소망은 그가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과도 관련한다. 그는 ‘배신당하는 일이 가장 두렵다’고 말하고, 거짓의 소문과 오해가 사람들의 입을 거쳐 타인을 재단하는 일에 분개한다. 2막에 오른 영화는 이제 대학생 시절의 진구를 비추는데, 여기서 그는 영화과 동기인 ‘옥희’의 곁을 따르며 부단히도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다. 진구의 옥희에 대한 사랑의 서사는 촘촘하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쌓여간다. 그들은 홍상수의 다른 연인들처럼 술을 마시고 또 몸을 나눈다. 그러나 우리가 4막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은 진구의 영화가 아니라 진구의 시선에 조연처럼 머물렀을 송 교수와의 만남을 그리는 ‘옥희의 영화’다. 송 교수에 최고 점수를 받은 건 진구의 영화라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던 옥희의 작품은 영화의 마지막을 선연히 채운다.

 

 그러니까 홍상수의 시선이 이끄는 곳은 결국 진행형이 아니라 미완성의 사랑이다. 그는 어쩌면 사랑이란 그것이 끝나고 난 다음에서야 제대로 서술될 수 있다고 믿는 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작품에서 연인들은 사랑이 아니라 연애에 골몰한다. ‘대체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 사랑 앞에서, 애착의 대상을 잃은 그의 인물들은 공허를 견딜 수 없어 새로이 대체의 방법을 찾는다. <해변의 여인(2006)>의 ‘중래’는 ‘문숙’을 얻고 또 잃었던 사랑의 장소로 회귀해 (문숙과 닮은 얼굴이라던) ‘선희’와 밤을 보낸다. 심지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는 동일한 시/공간을 돌이켜 만남을 번복하는 판타지의 영역에 들어선다. 그래서 ‘그 때’의 ‘문희정’은 틀렸고, ‘지금’의 문희정은 ‘맞다’는 다소 위험한 도식 속에 상대를 그대로 대체해 놓는다.

 

 4막, ‘옥희의 영화’의 주연인 옥희는 지난 해 송 교수와 새해를 함께 맞았던 그 아차산을 현재의 연인인 진구와 함께 오르기로 한다. 그 경험이 이상한 흥분과 죄책감을 안겨주었다고 되뇌인다. 두 남자에겐 이제 ‘나이 든 남자’ 그리고 ‘젊은 남자’의 이름이 붙는다. 옥희는 어쩌면 앞서 언급한 홍상수의 작품들이 그래왔듯 영화가 지닌 마법 같은 형식을 빌어 나이 든 남자가 남기고 사라진 자리를 젊은 남자로서 메울 수도 있었다. 헌데 나이 든 남자는 여전히 옥희의 시선 속에 황망히 다가오고 또 사라지길 반복한다. 젊은 남자가 쉬이 지나치고 만 어느 잘생긴 나무 앞에서 혹은 사슴 조형물 앞에서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떠든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데, 정말 힘든 일이 생겨서 서로 보지 못하게 되면(...) 그러니까 매년 1월 1일 오후 1시에 이 나무 아래서 기다리는 거야. 혹시, 헤어지게 되면”

 

 시간은 이미 1시를 훨씬 넘어있었으나 옥희는 정말로 송 교수와 재회한다. 여기서 그는 옥희가 반추하는 ‘나이 든 남자’ 가 아니라 ‘송 교수’로서 다시 나타나 회상의 축을 무너트린다. 여기에서부터 옥희는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의 비교를 멈춘다. 또 스크린 속 배우들이 작품 바깥의 실제 인물들과 가질 괴리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4막의 ‘옥희의 영화’란 정밀하게 재구성된 이미지일 뿐 실제의 이야기를 우리는 끝내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이미지로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실재들과 영화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끝에 처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랑했던 존재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시인하는 일이다.


 <옥희의 영화>는 근원적으로 회고의 정서를 안고 있는 작품이다. 1막에서 4막까지 인물들은 현재에서 과거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만남에서 이별의 공간으로 자꾸만 미끄러진다. 더 깊이 미끄러질수록 이전에는 마주할 수 없던 홍상수 영화의 새로운 풍광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인물들이 연애나 섹스가 아니라 이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홍상수의 겨울에서 다시 이 폭설 후의 처연한 풍광과 마주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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