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短編’的)
박지인 <전학생>
이채현
타인의 우주는 한 문장이 될 수 없다

 안녕 나는 수향이라고 해, 안녕 나는 수향이라고 해. 수향은 입을 다문다. 몇 번을 되뇌고 연습한 그 말은 이제 그 말이 될 수 없다. 어떻게 말해도 다시는 수향이 바랐던 그 말이 아니다. 잘 부탁한다는 말 뒤로 수향은 아나운서가 꿈이라는 말을 했을지 모른다. 혹은 나는 이런 성격의 사람이라거나, 전날 밤 교복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었는지 수줍게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수향은 '북한에서 왔고 많이 도와줘야 하는 친구'가 되었다. 수향이 수십 번 상상했을 그 날의 풍경에 그 문장은 없었다. 수향을 정의한 타인의 한 문장은 수향의 것만이 아니다. 언젠가는 라옥을, 또 언니를 가두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삶을 사는지 문장은 관심이 없다.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그들은 동시에 '북한에서 온 도와줘야 하는 누군가'가 된다. 수향이 두려워하던 시선이 다시 그곳에 있다.

 

 내가 어디서 왔건, 지금 여기 살고 있는데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는 라옥의 말이 맴돈다. 나조차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어쩌란 건지 모르겠는데 타인의 문장은 너무도 쉽게 완성된다. 한 문장으로 이쪽과 저쪽의 세상이 안전하게 갈라진다. 그쪽 세계의 너희는 영원히 이쪽 세계가 될 수 없으니, 너를 우리가 돕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다.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 누구도 쉽게 선생님을 탓할 수 없다. 대체로 그와 다르지 않았고, 거기엔 악의가 없었다. 그저 그 둔감함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 왔는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천만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지금 옆에 서 있는 그 열 몇 살의 소녀가 안녕이라는 입을 떼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불평등한 세계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불행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 영원히 이방인이어야 하는 수향에게 이쪽 세계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불행하게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때문에 더욱 잔혹하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전날 밤, 수향은 교과서에 실린 이북 출신 시인의 시를 읽는다. 이번에도 얼마나 일할 수 있을지 모르는 엄마, 웃는 게 영 아니 된다는 언니, 얼른 돈을 벌고 싶다는 라옥이, 우리 모두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밤을 밝히는 건 쉽지 않다. 어둠은 너무나 진하고 아득해, 작은 불빛 몇 개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수향이 다물어야 했던 입을 떠올린다. 둔한 우리가 그 무감한 잔임함을 몇 번이고 떠올리길 바란다. 그렇게 조금씩 빛이 켜지길 소원한다. "별이 잘 안 보여도, 불빛은 많지 않니."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건 결국 불빛을 켜는 자의 몫이다. 어둠에 익숙해져 별을 찾으려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귀하고 사랑하고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우리가, 넘치는 사랑과 슬픔의 나날 속에서 함께 슬퍼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안전하게 나누어진 세상보다 불완전한 우주에서 함께 하기를.

 

네이버 인디극장 <전학생> (http://tv.naver.com/v/13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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