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족관

안국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천혜윤
“깨어나, 앨리스!”

 생각해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의 세계에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거의 불필요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기괴한 이미지들이 즐비해있었다. 여타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을 관통해 온 교훈적인 가치들은 이 이야기에선 도무지 소용이 없다. 주인공 앨리스는 응당 그 나이대의 소녀들에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모습들을 손쉽게 배반한다.‘미성숙한 여성’ 으로서의 매력은 거의 부재하며, 금기로 가득한 옛 신화들을 조롱하듯 순전한 호기심을 이유로 주변의 것들을 먹고 마신다. 그러나 앨리스가 발 딛은 세계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꽃밭에서 함께 노래하던 꽃들은 그녀를 잡초로 오인해 쫓아내고, 어느 티 파티에선 정신이 나간 모자장수에게 무려 364일에 해당하는 ‘생일 아닌 날’의 축하를 받는다. 이 거대한 아이러니의 끝에서 앨리스가 마주하는 진실은 하나뿐이다.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긴 꿈에서 깨어나는 일 뿐이라는 것.


 그럼에도 디즈니 버전의 ‘앨리스’는 여전히 어린이들에게 훨씬 유효할 영화일 것이다. 마땅한 상식들을 부정함으로서 바로 세워지는 이 이상한 나라와, 오로지 자신이 보고 듣는 그 만큼만을 진실의 범위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방의 존재들을, 어른이 된 우리가 어떻게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상황을 해석 가능한 것으로 치환해 특정한 논리적 연결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어른의 욕망이라면, 21세기의 ‘성실한 나라’란 그 욕망이 이룩한 장엄한 왕국이다. 누구나의 손에나 공평하게 들려진 ‘성실함’이야말로 존엄한 삶을 위한 보편의 조건이라는 믿음. 교훈과 논리가 거세된 세상에서도, 우리는 이 합당한 논리와 관계하려 애쓴다.

 

 ‘수남’은 성실한 나라의 가장 훌륭한 시민으로, 자신의 모든 쓸모를 빌어 일한다면 언젠가 집도 사고 아이도 낳아 사랑하는 남편을 다시 웃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수남 부부가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쓸모는 온전한 손과 발, 청력 같은 아날로그의 잔재다. 청력이나 손가락을 잃는 일은, 도구나 기계가 낡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수남 곁을 지나치는 많은 ‘전문인’들은 그녀의 비극을 극복할 방안을 알려준다. 문자 그대로 말이다. 세 가닥의 손가락을 영영 잃은 남편에겐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길 땐……’ 으로 시작하는 조언을 주고, 그가 자살시도 끝에 혼수상태에 빠졌을 땐 ‘미납금도 많은데……’ 라는 염려로 존엄사를 권한다. 상담사, 의사, 그리고 형사와 같은 인물들은 이 세계의 논리에 대해 의심하는 일이 없다. 수남의 비극에는 마땅한 이유와 해결의 방법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고 있는데 할 수 없는’ 성실함의 부조리는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만 남겨진 몫이다.

 

 수남의 깨달음은 관객보다 더디다. 손과 발에 이어 존엄과 품위를 내놓아야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이곳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출구 없는 깊은 굴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비논리의 질서가 잠식한 세상에서, 집을 사고 집을 빌려주고 신문을 배달하고 생선의 내장을 가르던 어제와 오늘의 낮과 밤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컬트적인 과장으로 채색된 영화 후반부의 잇단 살인들은 그녀가 이 세계와의 조화를 어떻게 포기해갔는지 조명한다. 그녀의 살인에는 윤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로지, 그 자신의 작은 성취들을 이루기 위해, 수남은 이 세계의 일부분을 망가뜨리기로 결심한다.

 

 병원의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수남을 감금한 세탁소 청년은 죽어야만 하고, 무관심한 상담사는 수남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최소한 들어보기 위해) 강제로 묶이지 않으면 안 된다. 위와 같은 사건들로 체포되지 않기 위해선, 무고한 형사 두 명이 죽어줘야만 한다. ‘이해해주세요’, ‘어쩔 수 없었어요’ 와 같은 위로와 변명의 말들이 수남의 곁을 떠돈다. 오로지 수남의 몫이었던 ‘문자 그대로’의 논리들은 고스란히 타인에게 되돌려진다.

 

 ‘깨어나, 깨어나야 해’, 앨리스는 열쇠구멍 바깥으로 잠든 자신을 발견한다. 여왕과 스페어 카드들은 그녀의 목을 노리며 맹렬히 뒤쫓고 있다. 이제 선택지는 두 갈래 뿐이다. 이 긴 꿈에서 깨어나거나, 죽고 말거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결말이 은유하는 길은 그러나 단 한 갈래뿐이다.

 

 수남이 사라진 자리는 묘한 스산함을 안긴다. 이 일련의 복수극이 유쾌하지 못한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길고 아득한 악몽에서 언젠가 깨어날 수 있다면. 열쇠구멍 바깥에, 잠든 자신이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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