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短編’的)
정혁기, 조현철
<뎀프시롤 : 참회록>
이채현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새롭게 끝낼 수는 있다

 과거의 환각은 주로 장구 소리에서 시작된다. 판소리와 복싱이, 교환과 병구가 모든 풍경에 함께였던 때로 돌아간다. 미안한 건 많고 카리스마도 신명도 없는 지금의 병구는 사라지고, 교환의 장단에 맞춰 신나게 스텝을 밟는 병구만 있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다시 펀치드렁크˙로 복싱을 그만둬야 하는 현실이다. 불안하고 무섭고 그렇다. 나도 복싱 할 수 있다고, 하고 싶다고 흐느끼는 병구에게 교환의 장단이 들려온다. "지금 막 불안하고 무섭고 그렇지. 왠지 알아? 원래 가장 중요한 건 눈에 안 보이는 법이니까." 휘모리, 자진모리, 과거에 어떤 이유로 복싱을 그만둔 병구를 붙잡기 위해 교환이 두드리던 장단이다. 이미 지나간 시절의 장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판소리 복싱을 보여달라는 민지의 말에, 병구는 무슨 소리냐며 웃지만 몰래 몸을 흔들어본다. 그때처럼. 지독하던 현실이 꿈과 비슷해진다. 교환과 함께 앉았던 정자에 민지와 앉아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교환과 달리던 천변을 민지와 달리고, 민지와 나란히 샌드백을 치며 땀을 흘린다. 민지와 교환이 겹치고 현실과 꿈이 겹쳐진다. 혼란스럽고 헷갈리는 기억 속에서도 장단만큼은 선명해진다.

 

 링 위에 오른 병구는 결연하게 스텝을 밟고 펀치를 날리지만, 스텝은 엉키고 펀치는 엉성하다. 무너져내리는 동안 병구는 교환을 떠올리고 민지를 생각한다. 보여주세요, 판소리 복싱. 병구는 다시 교환의 장구소리에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해 판소리 복싱을 한다. 신명나는 리듬이 끝나자 병구는 링 위로 쓰러진다. 눈을 뜬 병구는 민지에게 꿈을 꾼 것 같다고 웃는다. 민지씨도 관장님도 내 친구도 나왔다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교환이 떠날 때 들려준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진다. 

 

 길고 이상한 꿈이 끝났다. 그때 할 수 있었으면서 그만둬서 미안해. 네 장단에 신명났던 그때를 스스로 잃어버려서 미안해. 너를 잃어버려서 미안해. 미안할수록 그때는 더 아름다워지고 더 슬퍼진다. 병구는 이제 그만 미안해하려고 한다. 과거의 너에게, 그러니까 나에게 더는 참회하지 않기 위해 이제 여기서 스텝을 밟는다. 지금 여기에 진심으로 기도하는 관장님과 봐주지 않겠다며 웃는 민지가 있다. 더 이상 미안해 할 수는 없다. 현실은 꿈 같을 수 없어서 병구는 자꾸만 넉다운 되겠지만 그래도 계속 링 위에 오를 생각이다. 무언가를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환의 장단처럼, 관장님의 기도처럼, 민지의 미소처럼.

 

 이것은 기나긴 참회록, 참회를 마친 자는 다시 스텝을 밟는다. 무너지고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링 위에 오른다. 그러자 멈춰있던 결말이 다시 움직인다. 어떤 이유로든 병구는 링 위에 다시 섰다고. 잊어가면서도 잊히지 않았다고. 실패하면서도 웃었다고. 종종 무너졌지만, 종종 장단을 맞췄다고.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고. 결말을 바꾸어 적는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펀치드렁크 : 복싱선수와 같이 뇌에 많은 손상을 입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뇌세포손상증 

 

 

 네이버 인디극장 <뎀프시롤: 참회록> (http://tv.naver.com/v/539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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