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短編’的)
고형동 <9월이 지나면>
이채현
지나갔지만 사라지지 않는 시간 속의 사람들에게 

 나는 대신 달려주는 승조의 등을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대신 달려주는 승조의 뒤를 따라 달리는 지연의 마음을 떠올렸다. <9월이 지나면>은 조금 지치고 무력해지는 시기에 자주 꺼내보는 영화였고, 그것은 승조의 등에서 나는 여름밤 냄새 때문이었다.  

 

 영화에는 공동작업이 중요한 건축과에서 겉도는 뚱한 표정의 지연과 어쩐지 뭐든 도와줄 것 같은 얼굴로 애매하게 웃는 승조가 나온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지연은 선배의 설계도를 훔쳤고, 승조는 지연의 과제를 도와주기로 한다. 그러니까 승조와 지연은 9월에 있다. 여름이 지나는 시기이자, 겨울이 오기 전에 내어주는 유예기간 같은 시간이다. 지연과 승조는 지나가고 있는 여름을 노래하거나 시종일관 눈이 내리는 영화를 본다. 영원하지 않은 여름이 이제 곧 끝날 것을 아는 사람들 처럼. 

 

 그리고 짧은 여름이 끝난다. 지연이 선배 선영의 설계도를 훔쳤다는 걸 승조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지연은 다시 혼자가 된다. 옥상에서 작업하던 지연은 지나가는 승조를 향해 뚜껑을 집어 던진다. 나는 지연이 아무 잘못도 없는 승조에게 화가 나는 것이 기뻤다. 왜냐하면 그건 지연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알아버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연은 선영의 설계도를 돌려주려다 쫓기게 되는데, 이때 승조가 지연을 대신해 쫓기기로 한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추격전이 시작되고, 지연은 자기 대신 범인으로 분한 승조를 쫓는 무리에 껴 달리는 승조의 뒷모습을 본다. 바로 그 승조의 등에서 여름밤 냄새가 난다. 그건 누군가를 위해 대신 달려줄 수 있는 사람의 등에서 나는 냄새다. 승조는 나카야마 미호한테 고마워하라고 했지만, 지연은 두고두고 그날 밤 승조의 등을 떠올리며 고마워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그런 작은 기적의 순간이 부르는 미래의 시간을 믿는다. 우리의 삶은 어떤 커다란 사건들의 결과 같지만, 그 보다는 이런 작은 순간들로 변화하고 있다. 나를 위해 달려주는 등을 본 적이 있다면, 절대 그 뒷모습을 배신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여름밤의 냄새가 길고 긴 겨울을 견디게 한다. 

 

 항상 9월은 지치고 힘들었다는 승조가 이번 9월은 조금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9월이 지나면 깨워달라고 말하는 지연의 미소는 이미 9월을 시원하게 보내준 얼굴이다. 여름은 쉽게 깨어지는 시간이고, 우리는 또 다가올 어떤 시간들을 견뎌야 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가장 힘든' 시기인 9월은 꼭 필요한 시간이다. 그 아픈 시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알아가게 되고, 같이 견뎌줄 기억을 만들게 될 테니까. 언젠가 지연이 말했듯이 '어쨌든 그 시간을 버텨냈으니, 그것으로 대단'하다. 아마 이제 지연은 설계실 자리에 친 모기장을 걷어낼 것이고, 그것은 여름이 다 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해 9월, 누군가 지연을 깨워주었기 때문이리라. 

 

 

네이버TV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Karts) <9월이 지나면> (http://tv.naver.com/v/1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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