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시네마

애프터 시네마 : 뒤늦게 깨달은 그 장면, 대사의 의미. 영화를 빌어 전하는 자아성찰문 또는 고백서.

<범죄소년>, 강이관

진은영

보호관찰 중인 청소년 정지구는 병으로 거동이 어려운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제대로 된 보호망 없이 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지구는 그나마 자신을 찾는 친구들과 어울리다 절도죄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소년원으로 간다. 수료식 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며 갈 곳이 없어진 지구 앞에 사라진 줄 알았던 엄마가 나타난다. 본인 생활도 겨우 유지 중인 어린 엄마는 서툴지만 아들을 챙기며 조금씩 활기를 찾고 지구도 처음 받아보는 사랑에 어색해 하면서도 점차 마음을 연다. 그러나 짧은 행복을 이어가기에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고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둘이 서로를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청소년이 주인공인 영화는 언제나 흥미로웠다. 알 수 없는 친구 관계, 막연한 미래, 나를 이해 못 하는 가족 등 정도는 다르더라도 누구나 겪은 학창 시절 이야기는 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수업 중 교과서에 하는 낙서가 유일한 일탈이었던 사람에게 사건에 휘말리며 걷잡을 수없이 과감해지고 때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주인공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나라면 영원히 하지 못할 말이나 행동을 하며 주위에 파장을 일으키는 장면에서는 묘한 해방감마저 느끼곤 했다. 처음부터 연민을 유발하도록 설정된 인물을 객관적으로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을 거라며 시키지도 않은 면죄부를 주려 애썼던 데는 어쩌면 이미 그 행동들이 엄연한 범죄라는 것을, 고통받는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인공을 좋아해버린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었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고 - 지금에 와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지구는 범죄를 연상시키기 어려울 만큼 온순한 얼굴이었다. 싹싹하진 않아도 할아버지를 성실히 보살폈고 엄마의 서툰 애정 표현도 잘 받아 주었으며 여자친구에게 다정했다. 그런 지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관객이 그를 응원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폭행으로 다른 가정에 피해를 입히고 그러고도 재범을 저지르고 끔찍이 아끼는 여자친구를 임신 시켜 삶을 송두리째 망친 일은 그의 불안정한 심리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듯, 지구를 바라보는 카메라에는 분명 연민이 있었다. 당시엔 정말이지 지구가 안타까웠고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슴 아픈 사연이 범죄의 면죄부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이미 제대로 된 보호가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의 아이들을 쉽게 포기하는 학교 시스템과 턱없이 부실한 사회 차원의 보호망이 눈에 들어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최근 몇 년 간 청소년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며 관련한 소재는 영화나 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소위 ‘팔리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해자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과거와 달리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사회구조에 대한 어른의 성찰이 담긴 작품들도 많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영화는 가해자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공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피해자의 서사는 생략하고 끊임없이 소년 범죄자가 양산되는 사회 구조를 조망하는 데는 게으른 건, 내가 그랬듯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기를 꺼려 하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쉬운 길을 선택하곤 한다. 엄마는 진작에 도망간 아빠처럼 지구를 찾지 않을 수도 있었다. 비록 친구 집에 얹혀살며 친구의 직장에서 일을 하지만 나름의 보람도 느끼면서 나아지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유지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로 했다. 부양할 능력도 없으면서 덜컥 데리러 온 엄마를 아들은 원망할 수 있어도 제3자가 비난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럴 시간에 공교육으로 돌아가기에 시기가 늦어져 버린 학생을 위한 대안 교육시스템 또는 한 부모 가정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책에 대한 고민을 하는 편이 훨씬 건설적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영화가 근본적인 문제를 보려는 노력을 더 기울였다면 아무 조건 없이 생판 남인 엄마와 아들을 재워주고 먹여주었던 엄마의 친구를 매정한 사람으로 그리는 실수는 없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건 임신 시킨 뒤 책임지겠다고 무작정 찾아가는 것이 아닌 안전한 피임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의무 교육에 추가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지구는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면이 있지만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위치에서 ‘잘 살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학교에 다시 방문한 것도 엄마가 원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때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선생님이 제안한 것이 검정고시가 아니라 지금 시기에 적합한 대안 교육 기관이었다면 지구는 분명 성실하게 따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래를 충분히 계획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다. 범죄는, 특히 청소년 범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기적인 어른들이 만든 허술한 체계에서 빠져나와 버린 아이들은 가장 쉬운 범죄의 표적이 되고 피해는 또 다른 가해를 불러일으킨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 신뢰를 잃은 아이들은 더욱 깊은 범죄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초범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그중에서도 강간, 살인과 같은 중범죄 비율은 급격히 높아지는 현상을 둘러싼 배경을 살피지 않은 채 그저 죄목에 집중하여 당장의 처벌 수위를 높이자는 주장은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복무를 마친 아이들은 미숙한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올 것이다. 소년원으로 돌아간 지구는, 그 안의 수많은 청소년들은 과연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성매매 업에 뛰어든 엄마의 더 나은 모습으로 지구를 만날 수 있을까. 더 이상 아이들이 외면받지 않기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귀 기울이기를,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이미 수없이 내쳐진 사람들이 어렵게 낸 용기가 비난받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2023 by Andy Deck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