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립영화外인이다
1막 <그거 다 꿈이야>
2017. 08. 10
​진은영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2) 에서 소설가를 꿈꾸는 ‘길’은 파리의 밤거리를 거닐다 의문의 차를 타게 되고 그 곳에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조우하게 된다. 매일 밤 꿈 같은 시간으로 점점 빠져들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 하는 약혼자와 결국 결별하기에 이르는 길. 더 이상 낭만의 시대도, 헤밍웨이도 다시 만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길은 파리에 남기로 한다.  

 

 다행히도 난 내가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슬프지 않았다. 예술가가 될 수 없는 대신 예술가 곁에 있고 싶었다. 예쁘지 않아도, 특별한 감각을 타고 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언젠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영화를 보는 것 외에 업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난 몇 개월 간 커피를 팔아 모은 돈으로 영화 교육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하나씩 배워가다 보면 뭐든 조금씩 보이겠지 싶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한숨도 못 잔 채 갔던 첫 수업에서 백경숙 PD님(<판도라>, <방황하는 칼날> 외 다수의 한국 영화를 제작하셨다)을 만나게 된다. 감독이나 배우 외의 영화인(게다가 그 귀하다는 여성영화인!)을 직접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는데 계약서 보는 법, 캐스팅이 이루어지는 과정, 빼곡한 촬영 스케줄, 연출자와 제작자가 실제로 일 하는 방식 등 인터넷 검색 따위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진짜’ 영화 일을 알아갈 때마다 앉아있기가 힘들 정도로 두근거렸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시나리오를 검토하거나 촬영 현장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허허벌판을 안개 자욱한 슬픈 사랑의 장소로 만드는 특수 효과 마법을 보는 등 영화 제작 과정의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였다. 영화인을 꿈꾸는 이에게 ‘영화 현장’처럼 사람을 반쯤 미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다만, 그들이 몸 담고 있는 현장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현장 사이의 차이를 난 알지 못했다. 약 6개월 간 길게는 1년에 걸쳐 거의 모든 영화 현장을 접했지만, 내가 본 건 그 일의 ‘가장 매력적인 일부’라는 사실을 체감하기에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젠가 PD님과의 수업 뒤풀이 자리에서였을 것이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PD님의 말을 경청하던 내게 그 분은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그 눈, 여긴 그게 전부야.” 그 순간 한여름 밤의 술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함을 느꼈던 건,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봐도 술기운에 잠시 마비된 감각으로 인한 이상 체온 현상은 결코 아니었다. 영화 한 편을 만들 때마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여명의 사람들을 만나 왔을 제작자의 눈에 나 같은 사람은 진작에 간파 당했을 것이다. 지금 저 눈빛이 몇 년짜리 눈빛인지,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지금은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비교적 충분한 시간을 두고 차근히 배워가는 아카데미와 달리 영화제는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 붓는 활동이었다. 짧은 대신 후유증이 길었다.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영화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이상한 공기를 몸이 기억한다(서울의 거리와 이상함의 정도는 비례한다). 영화제에서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의 일이라고 해봐야 스치듯 영화인들을 보고 저마다의 이유로 모인 사람들과 한데 섞여 끝없는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 좋았다. 대학생들에게 영화제는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은 업계였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영화제로 영화의 꿈을 키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영화제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는 건 업계 구조의 특성상 마치 개미지옥과 같아서 이 영화제에서 다른 영화제, 또 다른 영화제로 옮겨 다니기는 쉬워도 차곡차곡 나의 실력을 쌓아 더 크고 넓은 세계로 점프를 하기에는 그 동력이 턱없이 약했다. 단언컨대 영화제에서 자원활동을 했던 시기는 생애 다시 오지 않을 아름다운 날들이었지만, 동시에 한없이 무력한 날들이었다. 너무 좋은 걸 알아버렸는데 이 좋은 걸 어떻게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이후에 보다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현명하게 좋아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너무 좋은’ 기분에만 빠져 중요한 요소들을 등한시한 대가는 혹독했다. 

 

 지금은 사라진 독립영화전용극장 인디플러스의 활동은 독립영화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주로 개봉한 영화를 관람하거나 행사에 참여한 뒤 SNS 채널에 글을 써서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덕분에 좋아하는 작품들을 실컷 보는 것 외에도 가끔 배우나 감독이 행사에 오는 날엔 코앞에서 마음껏 그들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자리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채워졌다. 극장 매니저님은 활동비를 주지 못해 늘 미안해하시며 갈 때마다 선물을 한아름 안겨주거나 관계자들만 참석하는 뒷풀이 자리에 데려가 주시는 등 돈 외의 모든 것을 넘치게 챙겨주시곤 했다. 그 때의 난 활동비보다 영화인과 한 번이라도 얘기를 나누고 가까이서 보는 자리를 갈망했었기에 더 좋았다. 왠지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독립영화만이 지닌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장점’으로까지 느껴졌다. 양익준 감독님과 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날, 이렇게 가끔 영화인들과 대화할 수 있고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있다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망상이었다. 그 땐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 CGV 무비꼴라쥬(현 아트하우스)라는 곳에서도 유사한 활동을 꽤 오랫동안 했었다. 대기업의 대외 활동답게 큰 규모의 행사를 준비하거나 종종 톱스타를 보았고 훨씬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으며 또 다른 차원의 행복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름의 영화 관련 활동에 빠져 정신을 놓는 사이, 어느덧 나는 졸업을 코앞에 둔 취업준비생이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창 관심사부터 찾아 헤맬 때 나는 오히려 좋아하는 게 명확해서 혼란스러웠다. 영화 일을 할 건데, 그래서 영화의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알아내야 했다. 마음껏 배우고 경험하다 보면 어느 정도 방향이 보이리라 믿었는데 어쩐지 더 막막해지고 알 수 없는 불안감만 더욱 커졌다. 그 때 몸이 본능적으로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난 결코 영화인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꿈을 좇는 데에도 관성이 작용해 지금까지 영화를 사랑해온 내 이미지를 지키고 싶은 욕심과 아직 진짜 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합리화는 스스로에게 영화인이 아니면 끝이라는 최면을 걸었고 결국 어딘가 석연치 않은 마음을 품은 채 영화업계로의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1장  "아름다운 건 없어지지 않아.
그래서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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