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극장

라야 <집의 시간들>

이형관
2. 둔촌주공아파트

해방 이후, 폭발적인 서울의 인구 증가는 ‘주거 문제’로 이어졌다. 부서진 집들을 재건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상경했다. 다양한 키워드를 가진 공동주택이 건설되었지만, 주거난은 점차 심각해졌고 획기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아파트였다.

최초의 아파트인 종암아파트(1958)를 시작으로 1960년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택사업 일환으로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1962)가 건설되고, 한편에서는 불량 주거지를 개선하고자 판자촌 곳곳에 대량으로 시민아파트가 건설된다. 하지만 1970년 마포 와우아파트가 붕괴하면서 서민 아파트의 꿈은 사라진다. 이후 강남, 잠실 등에 비싸고 안전한 아파트가 들어서며 4인 가족이 살기 적절한 중산층 아파트 시대를 맞이한다. 1970년대 후반 둔촌동을 포함한 강동지역은 강남, 잠실에 인접한 대단위 미개발지로서 잠재력이 충분했고, 서민층과 공무원 등의 무주택자를 위해 ‘둔촌주공아파트’가 건설된다. 둔촌주공아파트는 5,000세대, 100개 동이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쾌적한 주거환경과 단지 내 위치한 학교, 커뮤니티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뛰어났다.

<집의 시간들>은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기록이다. 카메라는 아파트 단지를 응시한다. 그리고 ‘장소 상실’이 진행된 거주민의 목소리를 담는다. ‘장소 상실’은 장소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는데, 외적·내적 이유로 사람과 물리적 환경·활동·의미의 무한한 소통이 끊길 경우 발생한다. 둔촌주공아파트는 주택재건축정비사업에 따라 장소 상실이 발생하는데, 이 장소 상실은 결국 인간과 장소의 원활하지 못한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그 근원은 인간으로 보고 있다. 아파트 거주민은 장소 상실로 인해 소외감과 박탈감 등을 느끼고, 영화는 장소에 녹아있는 그들의 삶을 재현한다. 이는 장소 상실로 인해 매몰된 삶의 기억을 꺼내보려는 시도로 사라진 장소를 현재형으로 고민하게 하는 동시에 장소가 내포하는 기억을 장소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언어로 소환하여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장소 개발을 고찰하게 한다.

영화의 구성은 단순하다. 카메라는 아파트의 한 장소만 바라보며 정적인 장소 상실 풍경을 담는다. 화면을 보는 이는 렌즈를 쫓아가는 기존의 수동적 입장이 아니라, 화면 속의 많은 개체들 중에서 임의대로 고르는 능동적인 입장이 될 수 있다. 이는 장소 자체에 집중하게 하며, 이때 장소 자체가 갖고 있는 내적 서사가 드러난다. 동시에 거주민의 내레이션을 통해 서사적 맥락을 진행하는데, 다른 아파트와의 차별성과 특수성을 강조하며 장소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둔촌주공아파트는 다른 아파트와 다른 부분이 있다. 5,000세대가 넘는 메가 단지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건폐율(12%)과 용적률(90%) 계획에 따라 넓은 인동간격과 풍부한 녹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주민들이 공유하는 공원과 공터는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고, 담장이나 펜스 등 폐쇄적인 물리적 경계는 없었다. 거주민들에게 아파트는 ‘소통 단절의 회색 공간’과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정겨운 이웃과 푸른 수풀이 함께하는 ‘삶의 터전이자 고향’에 가까웠다.

둔촌주공아파트는 현재 철거 및 이주가 완료된 상태로 곧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며, 2023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마지막 강남 로또’ 등의 수식어로 불리며, 단일 재건축 단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12,000세대가 넘는 가구가 입주할 예정이다. 기존 단지의 2배 이상의 규모이며, 일반 분양 물량이 약 5,000세대로 서울 내 공급 예정 일반분양 물량의 5분의 1을 넘는다. 현재는 HUG(주택도시보증공사)와 분양가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사업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아파트는 단순히 ‘사는 곳’이라기보다 환상과 이미지가 섞인 ‘사는 것’, 즉 상품으로 전환되었다. 생활환경의 일부지만 재테크의 수단이며 우리 삶을 구속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파트 생태계>, <율리안나>, <Sky Park View> 등 아파트의 이면을 살피려는 독립영화들이 등장했고, <집의 시간들>은 집단적, 사회적 차원에서 애착을 갖는 아파트의 기억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앞에 영화들과 차별성이 있다. 그들에게 아파트는 특별하다.

얼마 전, 지어진 지 30년이 된 봉천동의 한 아파트단지에 갈 일이 있었다. 높은 나무들과 세월이 만든 숲은 안락함을 주었고, 주민들만 아는 동선을 따라갈 땐 묘한 신비감도 느껴졌다. 둔촌주공아파트를 방문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어림짐작해 보았다. 언젠가 이 오래된 아파트도 허물어지고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새롭게 들어서는 그림에는 내 가족이 거닐던 마당은 아무리 찾아도 없고 밤늦게 귀가하면 수고를 위로하던 메타세쿼이아 나무들도 흔적이 없다. 그저 더 높은 건물과 밀도의 낯선 곳, 내 기억은 이제 이곳에 거주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30년 전, 둔촌주공아파트에 집을 구했던 승효상 건축가의 시평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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