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
​월례비행

지금 여기의 연애

김민범

연애의 끝에 결혼이 자리할 필요는 없다. 지금 세대에서 결혼은 감정의 문제보다는 가능과 안정의 문제에 가까워지고 있다. 연애로 끝난다고 해서 그 사랑이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랑은 하나의 순간 혹은 시절에도 있다.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는 동화 속에서만 종종 존재한다. 영화 <초행>은 이 시대의 결혼에 대해 고민한다. 6년을 만난 커플 지영(김새벽 분)과 수현(조현철 분)은 시기상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오랜 연애와 동거, 나이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결혼의 문턱에 자리시킨다. 가족들의 성화와 지영의 끊긴 생리는 둘을 보챈다. 그들은 아무리 살아도 계속 만나게 되는 처음 앞에서 머뭇거린다.

영화 속에서 대화는 지속적으로 유보된다. 지영과 수현, 연인과 가족, 인천과 삼척까지 모든 대화는 식사에 밀리거나 어색한 분위기로 인해 아예 닫혀버린다. 가족과의 만남은 그들에게 울음과 못남을 선사한다. 지영과 결혼을 재촉하는 엄마의 대화는 눈물로 막을 내리고, 수현은 내내 상냥하다가 말하지 못했던 가족사가 드러나자 괴팍해져서 대화 자체를 뭉개버린다. 결정은 미뤄지고, 균열은 차츰 커진다. 그리고 그들은 유예된다.

지영과 수현이 임신 가능성에 대해 어물쩍 이야기하다 잠든 밤, 다음 장면은 둘의 이사풍경으로 이어진다. 떠나기도 전부터 그리워지는 동네 탕수육 먹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문득 옆방에서 아이가 운다. 꿈이다. 지영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찾아 문을 연다. 꿈속에서도 자주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술을 먹지 못하는 수현이 소주를 찾아 마신 일도, 무난히 이어지는 낯선 대화도 괜찮다. 그러나 아이는 아니다. 평범한 꿈은 악몽이 된다.

수현은 지영을 달랠 때마다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진저리쳐지는 오늘이지만, 정말 두려운 일은 여전히 ‘무서운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없다. 세상은 일순간에 지옥이 되지 않는다. 가능성이 없다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재앙이 시작된다. 지영은 곧 PD가 될지도 모른다고 부모님에게 이야기한다. 수현은 작가를 목표로 하며 미술 대학원에 진학을 생각한다. 그들의 꿈은 한 장면씩 스치듯 등장한다. 지영이 PD가 됐는지, 수현이 대학원에 진학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내내 길을 잃던 지영과 수현이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은 광화문 광장이다. 목적지이자 시작점인 광장에서는 길을 잃지 않는다. 그들 연애의 끝에 결혼이 있을지, 언제나 새로운 이별을 맞이하게 될지 확률은 똑같이 반반이다. 다만,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둘이 같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영과 수현은 손을 잡고 천천히 가능성의 세계로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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