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歌
백승화 <걷기왕>
페퍼톤스 <공원여행>
유성현
"흙길이든 꽃길이든, 경보를"

학교 앞 정류장을 지나 작은 횡단보돌 건너면

오른쪽 골목이 보이지? 그 길로 쭉 들어가 봐

‘붉은 레인을 질주하는 Sprinter-’ 처음에는 이렇게 글을 시작하려고 했다. 시놉시스만으로 보면 <걷기왕>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한 줄로 ‘멀미 소녀의 경보 도전기’로 요약됐으므로. 출발을 알리는 경쾌한 총성, 떨리는 호흡. 순위와 승패를 떠나서 눈앞에 있는 시합이 주는 설렘과 감동은 달리기든 경보든, 종목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전달되는 것이었을 터였다. 페퍼톤스의 ‘Ready, Get Set, GO!’를 다시 찾아 들었던 이유로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좀처럼 이 노래를 재생할 구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뛸 만도 한데, 좀처럼 숨이 가빠지지 않는 영화. 여기에 ‘지금 여기서 숨이 멎어도 후회 따위는 없어’ 라니,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만복’(심은경)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살짝 젖어있는 길 위로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

휴일 아침 맑은 공기가 많은 것을 새롭게 할 거야

 

그러고 보면 만복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복으로 가득 차있을 것 같을 뿐 아니라 발음에 따라 '만보기'가 되기도 하니, 그 이름으로는 애당초 평생 걸을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개명을 하는 게 어떨까 싶을 정도인데, 이런 성명학적인 접근 대신 눈에 띄는 신체적 이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일방적인 노력을 강요당한다. 순탄치 않았을 만복의 유년 시절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면 가슴이 아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천진하고 밝게 걷는 만복은 <걷기왕>의 착한 이야기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씩씩하게 더 밝게 더 경쾌하게

둘! 둘! 셋! 넷! 튼튼하게 아주 조금 더 기운차게

 

하지만 이 매력적인 주인공의 본의와는 달리, 이야기에 온전히 공감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 속 우리에게는 극심한 멀미 이상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녀의 게을러 보이기까지 한 '태평함'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만복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훨씬 있음직하다면 있음직하다. 꿈과 진로 설정에 집착하는 교사와 무조건적인 '노오력'을 강요하는 부모, 치열하게 오늘을 사는 선배와 치밀하게 내일을 계획하는 친구까지. 주위에서 한 번쯤 들어봤거나, 지켜 봐왔음직한 다양한 군상들의 면면들은 <걷기왕>이 '만복의 도전' 이상의 보편성을 확보하게 한다.

 

널 따라오는 시원한 바람 길가에 가득한 아카시아

아무도 돌보지 않지만 건강하게 흔들리고 있어

 

물론 다양한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려 한 탓에 각각의 관계나 갈등을 집요하게 파고들지 못한 것은 아쉽다. 만복과 서로 다른 대척점에 있는 육상부 선배 '수지'(박주희)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 '지현'(윤지원)과의 관계 둘 중 하나에만 집중했더라도 훨씬 전개에 힘이 실렸을 것이다. 둘의 관계가 옳고 그름을 정의하기 힘든 문제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쉽게 갈등이 해소된다는 느낌은 지우기 어렵다. 주변 인물들이 이야기를 평평하게는 만들어주었으되 팽팽하게 당기지는 못한 셈, 페퍼톤스의 노래가 어색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긴장의 부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은 스포츠 영화로는 꽤 치명적인 단점이지 않은가. 생각이 이쯤에 이르렀을 때, 심판이 쓰러진 만복에게 묻는다. 계속 뛸 거냐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다싶은 결정적인 대목, 기대했던 대답은 ‘아뇨, 걸을 건데요.’였다. 1등하지 않아도, 다시 일어나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니까.

 

하나! 둘! 셋! 넷! 씩씩하게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둘! 둘! 셋! 넷! 튼튼하게 아주 조금 요란스럽게

 

그런데 만복의 대답은, 뜻밖에도 ‘그만 뛸래요.’였다. ‘그만’보다 ‘뛸래요.’에 더 놀랐던 고백. 이미 저만치 달려 나간 조급한 마음에 숨이 가빠진 것이었을까. 눈앞만 응시하던 시선이 머리 위로 향하는 순간, 앞선 이의 등을 쫓아 조급히 뛰던 그녀가 대大자로 누워 하늘의 비행기를 보며 하는 그 말. 그것은 회피나 포기로 좌절한 이의 변명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한 이가 '달리 다시 걷겠다.'고 한 당당한 선언이었다. 붉은 레인을 질주하는 스프린터가 아니라 씩씩하고 튼튼하게 매일 등굣길을 걸었던 소녀는, ‘경보왕’은 아니어도 분명 ‘걷기왕’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러시아까지 걸어서 다다를 꿈을 꾸는 그녀에게, 세계는 하나의 공원 같은 게 아닐까. 말 그대로 공원여행, 다시 페퍼톤스의 노래처럼. 그렇게 '1등이 아니어도 돼' 혹은 '이기지 않아도 돼'를 떠나 마침내 '경주'라는 그 울타리 자체를 훌쩍 넘어 걷는 만복의 건강한 미소가 주는 후련함에, 따라서 훌쩍 경보로 떠나고 싶어졌다.

 

누군가와 겨루는 걸음競步 말고 나만의 가벼운 걸음輕步으로.

어때 기분이 좋아졌지? 한결 맘이 후련해졌지?

여기 숨찬 내가 보이니? 너에게로 달려가고 있어

거봐 너 아직 그런 미소 지을 수 있잖아

페퍼톤스 <공원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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