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네마

이광국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신철규 ​'유빙'

김민범
"혼자 꾸는 꿈"

가끔 오래된 꿈을 꾼다. 그 안에서 나는 쓰는 사람이 되어있다. 마감이 얼마나 남았는지, 무슨 글을 쓰는지 알 수 없다. 고단한 등을 보이고는 서릿발처럼 쓰고 있다. 그 모습이 부러워 오래 잠든다. 쓰고 싶은 마음인지, 되고 싶은 마음인지 불투명하다. 너무 급히 얼어버린 꿈이다. 얕게 생긴 틈으로 불행이 들러붙는다. 빈틈은 벌어지고, 침식되는데 여전히 꿈은 깨질 줄을 모른다.

 

경유(배우 이진욱)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여전히 글을 쓰냐는 질문에 경유는 ‘지금은 안 한다’, ‘아무렇지도 않아’라는 말들로 답한다. 경유는 영화 내내 떠돈다. 부모님이 오셔서 잠시 며칠 나가 있어 달라는 여자친구 현지(배우 류현경)의 부탁으로 시작된 여정은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지속된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글 쓰는 일이 전부라서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 자리도 얻지 못한다. 유일하게 가진 자격증인 운전면허로 대리운전을 하며 하루를 버텨 나간다.

유정(배우 고현정)은 소설가다.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한 작품만 더 발표하면 소설집을 모을 수 있을 만큼 써왔다. 그녀는 소주를 약 삼아서 살고 있다.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하는 소설을 생각하면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늦은 밤, 몇 사발의 소주를 집어삼키고 대리기사를 부른다. 경유가 걸어온다. 연인이었던 둘은 꿈을 잊은 사람과 꿈을 이룬 사람이 되어 외딴 언덕에서 조우한다. 경유와 유정은 다른 듯 비슷하게 얼어붙는 중이다.

유정을 마주친 다음 날 밤, 경유는 아침에 친구에게 빌렸던 품이 어벙하고, 손등을 절반이나 가리는 코트를 들고 돌아온다. 주머니에서는 소주 한 병을 꺼내고, 황금색 보자기로 싼 보따리에서 한우를 꺼낸다. 그리고 친구에게 고기를 구워 먹자고 한다. 친구는 출근을 이유로 거절하지만, 경유는 계속 구워 먹자고 조른다. 한우는 현지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려고 샀던 1등급이다. 용기 내서 찾아간 현지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연인이 소문도 없이 떠나버렸다. 이별이다. 소주는 잔뜩 취한 진상 손님에게 시달리고 나서 샀다. 인사를 하지 않았다며, 서비스업 아니냐며 멱살을 잡혔다. 경유가 운다. 구워 먹자며, 이거 먹자며 붉은 소고기를 터질 듯 움켜쥔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신철규, <유빙> 中

경유는 결국 다시 소설을 쓴다. 신춘문예 연락이 간다는 12월 중순이면 스마트폰 배터리를 항상 채워 다니고, 새해 첫날이면 자신이 냈던 신문에서 누가 등단을 했는지 살필 것이다. 자신의 소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보다 대단하지 않다며 자평을 하면서도 심사란에 자신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 꼼꼼히 읽을 예정이다. 문학은 한 번도 자신을 부른 적 없는데, 혼자 애태우며 울부짖는 기분이다. 어떤 날에는 이 모든 불행은 작가적 역량을 위한 시련일거 라는 망상을 할지도 모른다. 쓸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을 자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경유는 다시 첫 문장을 시작한다. 자신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자신이 쓴 글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꿈은 꿈이다. 이뤄도, 이루지 못해도 어쩌다 행복하고, 엇비슷하게 불행하다. 그렇다면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꾸준히 쓰다 보면 적어도 지금 자신이 왜 이렇게 불행한지 정도는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꿈에서 아직 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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