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네마

이환 ​<박화영>

김개미 ​'정오의 축복'

김민범

2019. 11.

"굴종의 땅에서는"

헝클어진 머리에 묻은 오욕은 쉽게 씻겨 내려가고, 스스로 더럽힌 등은 툭툭 털어내면 다시 깨끗해질 수 있다. 함께 하기 위해서 비천하고, 낮아져야 한다면 그건 내 몫이다. 무릎은 바닥과 가깝고, 입술에는 죄송하다는 말이 쉬이 고인다. 떠나지 않을 사람은 없지만, 그건 아주 나중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뒷모습을 모으는 일은 이제 지겹다.

완연한 폭력 속에 <박화영>이 있다. 여기서는 우두머리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바삐 꼬리를 감추거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재빨리 헉헉거려야 한다. 박화영은 자신을 엄마라고 지칭하며 가출팸에게 둥지를 제공한다. 무리의 대장은 최상위 포식자로 자신의 야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과시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박화영의 시선이 자주 머무는 친구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대장과 연애를 한다. 보금자리 주변을 맴도는 졸개들은 우두머리의 지시에 따라 친구와 맹수의 표정을 순식간에 뒤섞는다. 이곳에는 규칙이 없어서 아무 데나 침을 뱉고, 담배를 태우고, 몸을 섞는다. 이들이 박화영의 식구들이다.

여긴, 속이 허한 아이들에게 점심과 함께

욕과 노란 먼지까지 제공하는 특별한 별

트램펄린 위에 올라가 창자가 끌려나오도록 뛰고 또

모락모락 담배로 안개를 만들어도 시간이 남는 별

때때로 주먹 대신 머리로 벽을 들이받아야 하는 별

열 살 때까지 엄마를 언니로 알고 사는 희한한 별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들이 서둘러 늙어가는 별

자신보다 빨리 자라는 배때기 앞에서 공포에 떠는 별

 

김개미, <정오의 축복> 中

 

뒷모습에는 표정이 없어서 쓸쓸하다. 영화에서 박화영은 자신의 뒷모습을 두 번 보인다. 엄마에게 생떼를 부려 돈을 받아내서 치킨을 먹을 때, 월미도에서 잡혀 돌아와 대장 영재에게 구타당하고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때 카메라는 박화영의 뒷모습을 포착한다. 박화영은 엄마지만, 그녀의 엄마는 부재한다. 과거 박화영의 엄마는 그녀에게 집과 돈을 주고,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는 듯 떠난다. 박화영은 ‘엄마도 엄마 같은 엄마 만났으면 좋겠다’는 악담 아닌 악담으로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더이상 엄마가 없다면 박화영은 자신이 엄마가 되기로 한다. 밥을 먹이고, 집을 치우고,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자신이 받은 적 없는 애정을 난폭한 식구들에게 건넨다. 치킨은 허기를 달래주지 못한다. 닭 다리를 한입 가득 욱여넣어도 생각나는 건 돈을 세서 건네고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이다.

 

박화영의 시선은 미정에게 자주 멈춘다. 영재와 사귀는 미정은 박화영이 가장 아끼는 식구다. 온갖 힘든 일들은 자신이 해야 한다며 ‘나 없으면 어쩔 뻔봤냐’라고 허세 섞인 추임새를 붙인다.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박화영은 다 자란 척한다. 미정과 함께 떠난 월미도에서 영재에게 잡혔을 때, 박화영은 한참 홀로 도망가다가 다시 돌아온다. 뒷모습을 남길 수 없다. 짐을 치우듯 자신을 버린 엄마와 다르다. 그녀는 책임지는 사람이다. 돌아온 박화영은 영재에게 한참을 맞고, 미정은 영재 눈 밖에 난다. 박화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정에게 농담을 건네지만, 미정의 반응은 냉담하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박화영은 새벽 어스름 길을 혼자 걷는다. 가로등마저 꺼지며 그녀의 뒷모습은 더욱더 어두워진다. 어쩌면 또다시 뒷모습을 모아야 하는 순간이 왔다.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만큼 시간이 흐르고, 박화영은 식구를 잃었다. 그녀는 이제 엄마가 아니다. 다시 만난 미정은 침과 욕이 난무하는 행성에서 이탈한 지 오래다. 박화영만이 여전히 같은 별에 남아 ‘나 없으면 어쩔 뻔봤냐’라는 말로 자신의 영토를 확인한다. 그녀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가장 오래 남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궤도를 떠나 잃어버린 것들이 오랜 주기를 거쳐서라도 돌아오기를, 불시착한 것들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의 별에 남아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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