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네마

임정환 ​<국경의 왕>

기혁 ​'여독(旅毒)'

김민범

2020. 10.

"그치지 않을 여행"

  국경을 넘는 일이 시시해진지 오래되었다고 썼었다. 더는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조국의 운명을 걸지도 않는다고. 무심한 검역관들을 지나 도장을 받으면 다른 나라였다. 국경은 어쩐지 커다란 강이나 바다를 연해서 있을 것만 같고도 적었다. 갑작스레 국경은 단단해졌고, 당분간 월경(越境)을 위해서는 어쩌면 숨을 참거나 인생의 행로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국경의 왕>은 목마름으로 시작한다. 새벽이 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작은 페트병에 담긴 물을 모조리 마시는 일이다. 오랜 이동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면 목이 탄다. 긴 비행을 견디기 위해 마셨던 맥주나 와인, 위스키의 숙취 때문이거나 건조한 항공기의 실내 공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낯선 문자들이 온 사방에 가득하고,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공항 안내 방송이 이어지면 천천히 여행이 실감된다. 떠나온 목적은 제각각이지만, 낯선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갈증을 잠시 해갈한다.

  여행이 난삽해지는 이유는 갈팡질팡했던 경로 때문이 아니라 매번 예상을 빗겨가는 여정을 온전히 단속하고 싶다는 불가능한 욕망 때문인지 모른다. <국경의 왕>은 쉽게 시놉시스로 돌아가지 않는다. 몇 안 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쇼트가 바뀌면 새로운 시퀀스 위에 놓여 낯선 사람이 되거나 혹은 다른 관계로 등장한다. 같은 대사가 다른 인물에 의해 새롭게 발화하기도 하고, 앞서 등장한 물건이 다른 맥락 위에 놓이기도 한다. 이야기는 환원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국경의 왕’이라는 1부와 ‘국경의 왕을 찾아서’라는 2부로 나뉜 영화는 2부에서 앞선 이야기의 사건, 대화, 인물들의 재료로 환담을 나눈다.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2부는 1부의 기묘한 이야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부연하는 듯 보인다. 1부와 2부는 각각 두 편의 에피소드로 또 분절되고, 총 네 개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된다. 어떤 이야기가 원형에 가까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2부의 첫 에피소드에서 동철은 자신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는다. ‘우리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영화 안에서 하려다 보니까 결말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동철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만남을 그가 만들 영화 속에서 잘 단속하고 싶다. 동철의 고민은 <국경의 왕> 속 불균질한 서사를 정당화하는 비겁이 아니라 어떤 것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마음과 닿아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새벽은 말한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아마 다른 이야기 할 거 같아. 그게 뭐가 됐든 지금이랑 똑같을 수는 없을 거 같아.’ 새벽과 동철은 모든 에피소드에서 마주친다. 대화는 조금씩 변주되고, 이전과 다른 관계로 이어진다. 같은 시공간 위에 놓여있어도 공간을 각자 다르게 나눠 갖고, 시간은 나름의 방식으로 축적된다. 관계와 대화, 물건의 각도가 조금 틀어지면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이라는 낯선 시간 속의 이야기는 매번 다르게 복기 된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꾸린 뒤에야

그만큼의 외로움이 가짜인 걸 알았다

내가 가진 고지도의 경계들은 때론

대문 앞에서 시작해

경계를 타는 아슬아슬한 지명조차,

옛 애인을 본뜬 상형문자처럼 읽힐 때가 있다

 

낯설다는 느낌 하나를 얻기 위해 새들은

매번 둥지를 옮겨 짓는 것일까

황후를 감금해 구름이 되길 빌었다는 고대 설화에서

의심스러운 것은 가뭄이 창궐한 도시였지만,

바그다드를 출발한 저녁은

수천 년 사마르칸트를 지난 뒤에도 여정을 바꾸지 않았다

 

기혁, 「여독(旅毒」中

 

  새벽과 동철의 ‘낯설다는 느낌’은 쉽게 사라진다. 한 병의 물로, 귀국이 정해진 짧은 여행으로 모든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다. 둘은 쓰고, 또 찍어야 한다는 커다란 갈망 앞에서 말라붙는다. 이들은 모든 에피소드의 끝에서 어디론가 향한다. 떠나봐도 외로움은 계속 들러붙고, 우연을 이어붙여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떠나온 곳의 아침은 반드시 여기에 도달하고, 숙취 섞인 이곳의 저녁은 이륙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갈피 없는 방황도 결국 목적지가 생겨나고, 예상하기 어려운 새벽과 동철의 여정도 결국 결말에 도달한다. 그들이 배회했던 모든 장소들을 경유해서 돌아온 새벽은 마지막에 화면을 응시한다. 불가해한 세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바라보는 혹은 찍는 일임을 확언하듯이.

 

  지난 겨울, 일기에 썼던 국경에 대한 말들은 지금 통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행은 도착으로 시작해서 출발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행을 상상하는 한 국경은 끊임없이 새롭게 구획된다. 언젠가 다시 경계가 옅어지면 우연을 찾아 방황하고, 미묘하게 변한 말들을 살필 것이다. 거짓 외로움과 목마름에 속아 떠나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매일 뜨고 지는 해를 낯설다는 듯이 오래 바라보는 일이, 무표정하게 건네는 영수증을 일기처럼 생각하는 일이, 어깨 위 배낭 무게를 가늠하는 일이 분명 어떤 날들을 살게 한다. 다가올 여행은 닫혀있는 국경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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