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2020

시답지 않은 마음

<서정의 세계>

김민범

누구나 가장 시다운 시를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구나 가장 시답지 않은 시를 쓰고 싶어도 한다. (…) 가장 시답지 않은 시와 가장 시다운 시가 서로의 극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사실. 그걸 확인하려고 우리는 시를 쓴다. 1)

  어떤 날에는 세상이 온통 시가 된다. 매일 걷던 길이 생경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낯선 노래가 훅 끼쳐 새롭게 목록에 담긴다. 무심한 말들은 종일 여전하지만, 미묘한 단어들이 사이사이 끼어있다. 한없이 격한 감정과 속절없이 다소곳한 행동이 부딪쳐 파고를 만들어내고, 남은 자국들을 쓸어내다 보면 하루가 지난다. 무엇이었고, 아무 때였다고 특정할 수 없지만, 시시하지 않은 날임은 분명하다. <서정의 세계>는 자신이 시를 쓰지 않아 방학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초등학생 ‘서정’의 하루를 담는다.

  담임 선생님은 교과 과정이 끝나 방학을 기다리는 때에 학생들에게 시를 한 편씩 써보자고 말한다. 모든 학생이 발표하고, 이제 ‘서정’의 차례다. ‘서정’은 시를 쓰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학원에 다니지도 않고, 학교가 끝나면 바쁠 일도 없는데 시가 써지지 않는다. 친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에 대해 간단히 써내고, 다른 급우는 엄마가 좋아하는 파란색과 구름에 대한 시를 썼다. ‘서정’은 앉은뱅이 밥상 앞에서 골똘히 떠올려도 ‘마음을 나누어 줄’ 시를 쓸 수가 없다.

  ‘서정’은 집 앞에 나와 시를 기다린다. 바라는 시는 오지 않고, 소포를 보내러 가는 동네 할머니만 곁을 지난다. 할머니는 시가 무엇이기에 배를 곯아가며 쓰냐며 같이 시내 우체국으로 가자고 한다. 할머니와의 동행에서 아이는 나란히 걸으며 보이는 것들과 손의 감촉, 계절의 냄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시답지 않지만, 분명 마음을 잘게 스친다. 종일 있었던 일들을 모두 모아도 한 편의 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시가 그러하듯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담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노을을 향해 걸으며 풍경이 되는 중인 ‘서정’과 할머니는 시에 대해 말한다. ‘서정’은 아직도 시가 없어서 걱정이라고, 할머니는 가는 길에 주어가자고 농을 건넨다. 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서정’은 말한다. 시가 무엇인지 할머니가 묻자 아이는 말로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어떤 영화들은 종종 시 혹은 시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어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미지로 붙잡고자 하는 욕망과 낭만주의적 시선에서 빗겨나지 않는 시인에 대한 편견을 화면에 자주 채워 넣는다. 시는 무엇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저만큼 달아나기도 하고, 시가 아닌 것이 되기도 하기에 영화에서 장면이 시가 되거나 시적인 순간을 재현해 보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게 수렴한다. <서정의 세계>도 오래되고 슴슴한 시골 모습과 저물어가는 하루를 아름답게 포착하고, 시를 써야 방학이 온다고 믿는 어린 마음과 노인이 툭툭 던져놓는 삶에 대한 말들을 엮어낸다. 그러나 <서정의 세계>는 아주 드물게 오는 순간을 포착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대신 ‘서정’이 시를 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는 데 집중한다.

  방학식 날, 담임 선생님은 ’서정’의 시 발표를 잊는다. 선생님의 몇 마디 말과 함께 방학이 선언되고 만다. ‘서정’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친구들이 모두 떠난 뒤에 학교에 남아 ‘서정’은 선생님에게 이면지에 싼 군고구마를 건넨다. 거기에는 편지에 가까운 말들이 쓰여 있다. 영화는 지난 풍경과 함께 유려한 시를 읊거나 ‘서정’을 홀대한 친구들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을 택하는 대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서정’의 모습을 가득 보여 준다.

  시를 쓰지 않아도 봄은 오고, 방학을 얻을 수 있다. 온갖 풍경은 문장이 될 수 있지만, 모든 문장이 마음을 담지는 못한다. 오늘, 서정의 세계가 올 수도 있고 다시 한 번의 깜빡임으로 보통의 세계가 될 수 있다. 그날이 아니었다면 툭 털고 다시 오면 된다. ‘서정’에게 그러했듯 분명 달은 차고 ‘꽉 찬 하루’는 돌아온다.

1) 김언,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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