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2020

태풍은 지나가지만

<링링>

유성현

  아빠의 수첩에서 우연히 ‘링링’이라는 여성의 이름. 태풍을 바람으로 오해하는 딸.

  가족의 해체를 막기 위한 소녀의 고군분투 끝에 소멸하는 태풍과 함께 회복하는 가족애로 마무리되는, 조금은 뻔한 이야기를 지레짐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다. 앞선 밝고 가벼운 예측과는 반대의 경우라도 충분히 그려봄직했다. 작은 오해와 의심의 날갯짓이 초래하고 마는 커다란 재난 같은 사건, 나비효과가 떠오를 전개 말이다. 어느 쪽으로 바라보든 <링링>은 태풍에서 바람으로 이어지는 연상만으로도 유쾌한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지만, 동시에 희화화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비교적 가까웠던 실제라는 점에서 이런 농담에 대한 경계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동명의 2019년 제13호 태풍은 영화 이후에 온 것이지만.)

  그러나 영화는 줄거리에서 떠올릴 여느 가족 코미디/드라마적 이미지들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비틀어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근래 보지 못했던 분위기의 영화에서 먼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불편하고 불안한 정서다. 주인공 진아의 일상 깊숙이 스며든 바람의 일화들은 그 집중도로 인해 일견 작위적으로 비치기도 하나,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될 소녀의 오해가 의심으로 확장되는 상황으로서는 설득력 있게 배치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무기력하고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주변 인물들-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또한 주인공의 외적인 행동보다는 내적인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데 일조하는 역할로 보인다. 화목과 애정이 보장된 안정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언제든 붕괴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로 묘사되는 <링링> 속 가정에서, 부모(어른)가 아닌 자녀(아이)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기도 쉽지 않다. 붕괴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현실에서 소녀가 속수무책으로 느끼는 불안정한 무력감은 경계가 불분명하게 다뤄진 허구적 이미지와 뒤섞여 결과적으로 단순한 사건의 진위를 넘어선 복합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과거의 기억(꿈)으로 시작되는 도입에서부터 그 모호함은 불길한 조짐을 보이는데, 이는 결말부와는 수미상관적 대응으로도 어울리지만 중반부 링링이라는 이름이 적힌 유흥업소 쪽지에서 이어지는 장면과는 기능적으로 연결된다. 불평하고 있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찍고 있던 아빠의 사진은 소녀의 파편화된 기억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일 수 있고, 소녀의 상상으로 비친 링링과 아빠의 대화는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소녀가 실제로 본 것과 보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초조하게 헤매는 동안, 관객은 영화가 다 보여주지 않고 가리는 의도된 공백을 저마다의 상상으로 메꿔야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채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작 소녀와 같은 눈으로 목격했던 끝자락의 한 장면이, 직접 봤음에도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은 일종의 블랙 유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미스터리나 서스펜스에 더 근접한 영화의 과감하고 강렬한 미장센들은 어느 파격적인 해석에도 설득력을 더해줄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태풍은 지나간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보인다. 1978년 전까지 태풍의 이름은 여성처럼 온순해지기를 바란다는 이유로 여성의 이름으로만 붙여졌다는데, 외도의 오해를 샀던 링링이란 이름 역시 공교롭게도 홍콩에서 여성의 애칭으로 쓰이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태풍은 그런 불쾌한 바람 따위와는 무관하게, 글자 그대로 큰 바람만으로 한 가정을 사납게 휩쓸고 지나갔다. 빈자리의 허전함보다 남은 이들의 막막함이 더 절실하게 전해지는 묘한 부재. 침묵 속 느껴지는 것은 바람소리뿐일까. 아니다. 태풍 속 아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목격했던 것처럼, 소녀와 관객이 동시에 감지한 어떤 노골적인 시선들이 기어이 마음에 턱하니 걸리고 만다. 태풍은 사라졌지만 앞으로의 상처가 더 염려되는 소녀를 세차게 스치는 바람은, 어디에서 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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