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2020

기록의 기억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성미래

  계집애라 문맹으로 살아온 촌로가 이제야 글을 익힌다. 다시, 안치연이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학교에 다닌다. 둘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는다. 노인을 표상하는 이미지는 가난과 고독, 질병이다. 노년의 여성과 통한의 세월은 특히 떼어내기 어렵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노인에게서 전형을 벗겨낸다.

  할머니 사진을 찍어봐야 망신당한다는 몇 차례의 실랑이 이후, 노인은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창작자는 등을 보이고 앉은 인터뷰이를 바로 앉히고 이름을 묻는다. 그동안 할머니로 지칭되었던 인터뷰이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자신을 안치연이라고 또렷이 호명한다. 익명의 노인에서 인간 안치연이 되는 순간이다. 창작자는 시집을 여기로 와서 여지껏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고집스럽도록 묻는다. 누군가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그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영화는 안치연, 김용순, 조복례, 정진여를 촌부라는 무형의 집단으로 뭉개지 않는다.

  축적된 역사가 전부 다른 노년 여성들을 하나의 영화에 담아야 한다. 흔히들 지역의 정이라 부르는 환상을 입히면 간편하다. 하지만 창작자는 정체 모를 공동체성에 기대어 여성들을 손쉽게 융화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한 시절에 공유한 문화가 있었음을 밝혀 이들을 연결해내는 편을 선택한다.

 

  여느 조모와 달리 한글학교 학생들의 돌봄은 자신을 향한다. 안치연의 한글 공부는 자신을 천국에 보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다른 학생들도 각자의 이유가 있을 테다. 학생 모두가 그들 본인을 산다. 농사로 검게 그을린 얼굴이 자기 삶을 일군 흔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머니도 할머니로 태어나지 않았다. 노인 여성의 삶에서 돌봄노동을 삭제하면 이 당연한 사실이 밝혀진다.

  돌봄노동을 비워낸 지금의 자리는 과거에 대한 물음이 채운다. 학생들의 인터뷰는 고향과 ‘기릉지’를 같이 떴던 친구를 기억하냐는 질문을 품고 있다. 기억의 자극제라고는 몸에 새긴 표식이 전부지만 그 친구는 죽었다며 이내 답한다.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그에 담긴 기억을 떠올린 여성은 기록자의 위치에 선다.

  죽음을 덤덤히 입에 담는 노인에게도 바늘을 견디는 무모한 때가 있었다. 당신의 기억을 몸에 새겨서라도 잊지 않겠다는 거창한 의미는 아니었을 터, 구술자의 말마따나 기릉지는 당시 십대여성들의 유행이었을 뿐이다. 카메라는 과거 기록문화의 이름을 꼼꼼히 묻고 그것을 다시 기록한다. 기억만은 지나간 순간을 붙잡고 되새겨야 하는 선배들의 몫이다. 창작자는 문자 기록을 남길 수 없던 선배여 성들의 역사를 발굴하고, 오갈 데 없이 떠돌던 문화의 이름을 찾아주는 데에 몰두한다. 한글학교 학생들의 이름을 묻던 모습이 겹친다. 그는 기록이 후세대의 소명이라고 믿는 듯 보인다.

  영화 속 노년의 여성은 본인의 울분을 구술하지 않는다. 안치연이 드러내는 최대치의 설움은 눈물이 흐르려 할 때 목을 축이는 것이다. 한글학교 학생들은 계집으로 산 세월에 절망하지 않고 남은 삶을 책임진다. 읽고 쓸 자유를 위해 구태여 수고를 직면하는 자세에는 활력이 넘친다. 이들은 끝없이 자산을 쌓아가는 생의 행동가다. 선배의 실천은 언제나 고무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안치연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집 안을 기록한다. 계집도 사람이라는 진실이 다시금 떠오른다. 기록은 잊히지 않는다. 일기도 책도 쓰고 싶다는 안치연의 바람을 응원하며, 글 쓰는 여자라는 오래된 신인류의 탄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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