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포럼2020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달의 요정 세일러문>

진은영

오랜만에 외가 친척을 보러 가자는 엄마의 말에 미소는 어렸을 적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10년 전 이모네 집에 놀러 간 미소는 사촌 승관에게 세일러문으로 변신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왜 가르쳐 준 건지, 그래서 어떻게 변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제일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이 되었던 날인데, 미소는 그 기억이 어딘가 불편하다. 똑똑하고 듬직한 승관을 아들처럼 예뻐하는 엄마의 말에 혹시라도 놓친 것이 있을까 조각난 기억의 사이를 이어 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혼란스러울 뿐이다. 결국 미소는 승관을 만나 그날의 일을 직접 확인하기로 한다.

덜렁거리는 성격의 평범한 여학생이 사실은 세상을 구원할 전사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세일러문 이야기에 마음 뺏기지 않은 소녀가 있었을까. 여성들이 힘을 합쳐 나쁜 사람을 벌하고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서사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을 수십 년 전 소녀들에게 겨울왕국의 엘사 못지않은 강력한 존재였다. 미소는 세일러문을 좋아하냐는 승관의 질문에 비너스를 더 좋아한다고 답한다.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등장이었음에도 세일러문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해준 우상이자 위기에 처했을 때 결정적 도움을 주는 캐릭터인 비너스를 말한 건 미소에게 외적 취향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세상이 세일러문을 바라보는 방식은 미소의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우린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세일러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변신 장면이다. 그런데 악당과의 치열한 전투를 위해 세일러 전사들이 갖추는 무기는 칼이나 총이 아닌 반짝이는 매니큐어에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티아라가 전부다. 공격은커녕 달리는 것조차 불편해 보이는 짧은 치마와 하이힐이 말해주듯 애초에 만화는 여성 전사들의 전투력 따위엔 관심이 없다. 미소가 좋아하는 게 세일러문이든 비너스이든 그런 것 따위는 애초에 승관의 관심사가 아니었듯이. 

미소는 성인이 되었지만 여성을 대상화하는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딸의 다이어트가 최대 관심사인 엄마 옆에는 10년 만의 첫인사로 살이 쪘다고 하더니 여자는 관리가 생명이라며 마스크팩을 선물하는 이모가 있다. 참다못해 그만하라고 소리를 내면 여자답지 못 하다는 말이 날아온다. 그리고 네 명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승관이 있다. 승관은 아들로서 조카로서 친척 오빠로서 조언을 빙자한 여성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한여름에도 본능적으로 미소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존재 자체로 위협이 된다. 일상에 스민 크고 작은 폭력은 약자를 더 약하게 하지만 미소는 이상하게 점점 강해지는 확신을 느낀다. 그리고 어린 미소가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해변가에서 발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10년 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미소를 놓아주지 않았던 불쾌함, 고통을 주는 그것의 실체를 이제는 알 것 같다. 가장 좋았어야 할 시간을 최악의 순간으로 바꾸어 버린 성폭력, 그로 인한 수치심이었다. 

영화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그러나 쉽게 부정되는 어떤 경험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확신을 줄 수 있는지 묻는다. 세상은 너무나 쉽게 그런 사소한 것들은 잊고 더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로 여성의 경험을 축소시킨다. 실재했는지조차 판단이 어려운 일에 대해 그것이 사실은 폭력이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깊은 무력감과 절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억누를수록 되살아 나는 것이 바로 고통의 기억이다. 가까운 가족부터 미디어까지 끊임없이 미소의 입을 막고 혼란을 가중시키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영화의 엔딩에서 미소는 엄마에게 털어놓지만,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과거를 돌이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일러문을 좋아했던 과거의 자신을 탓하던 스스로를 멈추게 하고 싶었을 뿐인 지도 모른다. 주위 상황만큼이나 미소를 흔들어 놓은 이유였을지도 모를 그 자책감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우리가 자신의 경험에 확신을 주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않을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세일러문처럼 말이다.

© 2023 by Andy Deck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